민가협 출범
1984년 소위 학원자율화 조치로 제적 학생과 해직 교수들이 학원으로 돌아온 이후 몇 달 동안 감옥에는 학생들이 없었다. 교정에
상주하던 전경들은 철수했지만 그 자리는 교내 동정을 염탐하려는, 가짜 신분증을 소지한 외부인들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9월 말
서울대에서 몇몇 가짜 학생들이 발각됐다. 학생들이 이들 몇몇을 학생회실로 데려가 그 임무를 캐묻는 과정에서 손찌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경찰은 이 사건을 막 출범하려는 서울대 총학생회를 탄압하는 구실로 삼아 백태웅(학도호국단장), 이정우(총학생회장),
유시민(복학생협의회장) 등을 구속했다.
감옥에는 다시 학생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서울 서대문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 면회실에는 눈물범벅이 된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85년
5월 광주항쟁 기념집회가 잇따르면서 구속 학생수는 급증했다. 5월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이후 마침내 학부모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먼저
징역을 살고 있던 학생들의 부모가 미문화원 사건 가족들을 설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문화원 사건 가족들은 담당형사의 말에 따라 반성문을 쓰면
쉽게 석방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면회를 갈 때마다 자식에게 눈물로 호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석방을 구차스럽게 구걸할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자식들의 장래는 물론 나라의 미래를 구하는
일이라는 ‘대오각성’이 자연스럽게 이들 가족에게 생겨난 것이다. 이 과정에는 민청련 구속자의 젊은 부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85년 7월10일 이들은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최초의 발기취지문 초안은 매우 서투르지만 눈물겹고도 진솔한 명문이다.
“유달리 불의를 미워하고 제 조국을 사랑한 우리 아이들이 이처럼 혼탁한 정치풍토를 눈감고 지나치지 않았을 것은 이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불의한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올바른 사실을 알까 두려워 우리 아이들에게 온갖 음해와 모략을 뒤집어씌우지만 그러나 이
두려운 폭력 앞에 감히 누가 그처럼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올바르고 용기있는 자식을 키운 보람을 느끼며,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어려운 처지에서 살기가
힘겹습니다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닷새 뒤인 7월15일. 이들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 그날 이른 아침부터 전경 3개 중대가 미문화원
구속학생들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리는 서소문 법원 주변을 에워쌌다. 학생들을 실은 호송버스 두 대가 법원 후문으로 들어서자 국내외 기자들이
100명 남짓한 가족들과 뒤엉켜버렸다.
맨먼저 버스에서 내린 이는 구속학생 중 홍일점인 연세대 전진숙이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처럼 연이었다.
두 번째로 내린 함운경은 수갑찬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계호 교도관이 그의 입을 막았다.
이를 신호음으로 알았던가, 가족들은 일제히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법원 마당이 시위장처럼 됐다. 가족들이 대법정으로 밀고
들어갔다. 재판 시작 30분 전에 152석의 재판정은 300명이 들어차 송곳 꽂을 틈조차 없었다. 찌는 날씨 속에서 대법정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마른 몸매의 두 여성이 허리에 친친 동여매고 들여온 광목 원단을 찢어 즉석에서 방청객 숫자만큼 머리띠를 만들어 돌렸다. ‘장하다.
대한의 아들’ ‘애국학생이 용공이냐’ ‘독재정권 물러나라’ ‘광주사태 진상규명’ 등 매직펜으로 쓴 슬로건은 선명했다.
이윽고 피고인들이 입정했다. 함운경은 구호를 외쳤다. 방청객들은 일제히 ‘와아’ 하는 함성으로 화답했다. 법정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검사와 재판부의 소리는 함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월의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에 이어 ‘상록수’에 이르러
방청객과 피고인들은 한몸이 되었다. 그들의 뺨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더이상 재판이 진행될 수 없었다. 피고인석에서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는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거부 선언이 나오자 재판장이
피고인들에게 퇴정을 명했다.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피고인과 법원 정리 사이에 격렬한 몸짓이 계속되고 야유와 함성이 오갔다. 학부모들은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법정은 숙연해졌지만 이미 완전히 농성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재판은 그날 다시 열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이날 오후 행렬을 이루어 덕수궁 정문을 지나 광화문4거리로 진출했다. 어디로 향하느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시골에서 그날
새벽 차로 상경한 한 아버지가 말했다. “미 대사관으로 가서 물어봐야제. 참말로 전두환이가 정권잡도록 도와줬는지.” 행렬을 따르던 사복형사들이
워키토키로 일제히 어딘가로 급히 전했다. “미 대사관으로 간답니다.”
행렬은 광화문4거리 국제극장 앞에서 저지당했다. 미 대사관은 대각선으로 300m 전방에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염천의 뙤약볕 아래 몸을 가려줄 그늘은 한 조각도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법정에서 했듯이 외치고 노래부르다가 모두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수많은 자식들이 드나들던 경찰서로 부모들이 마침내 잡혀들어간 것이다.
학부모들은 수사실 여기저기서 칼잠으로 이틀을 지새우고 나왔다. 나와보니 예상치 않았던 파장이 있었다. 사상 초유의 법정농성 책임을
물어 전두환은 그의 충복인 법무장관을 해임했다. 또한 구속학생의 제명에 미온적이라 해서 서울대 총장도 쫓아냈다.
구속학생 학부모들이 미 문화원 사건 이후 바로 부닥친 문제는 5공 정권의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문제 학생들을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한 뒤 격리 수용해 순화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한 이 법안은 제2의 삼청교육대와 같은 것이었다. 학부모들은 ‘학원탄압저지 공대위’를
구성하고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여권 핵심부가 극비리에 성안해 관련부처 협의까지 마친 이 법안은 그러나 한달 후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전두환이
신민당 총재 이민우와의 회담에서 이의 보류를 발표한 것이다.
한편 경향신문은 85년 7월25일자 1면 머리기사로 학원안정법 제정 사실을 첫 보도했다가 편집국장과 사회부장, 취재기자 등이
안기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는 몇달 후인 85년 12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화 시위현장의 기동타격대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불의한 시대가 가장 온유한 어머니들을 가장 열렬한 투사로 길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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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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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5월 23일]
경향신문의 특종보도는 학원안정법 추진을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향신문의 폭로로 미 문화원 사건 구속학생 학부모들은 장기농성에 들어갔고 학원안정법은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치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결국 입법추진을 포기했다. 이는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5공 정권이 민심에 무릎을 꿇은 첫 사례로 꼽힌다.
경향신문은 이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당시 안기부는 손광식 편집국장(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고문), 홍성만 정치부장(전 경향신문 사장),
강신구 사회부장(전 문화일보 논설고문)과 총리실을 출입하던 김지영 기자(경향신문 편집국장)를 불법 연행했다. 안기부는 이들을 남산의 조사실로
끌고가 “취재원을 공개하라”며 구타했고 특종기사가 실린 신문 배달을 막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이들의 불법연행에 항의, 밤샘농성을 벌였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기사를 쓴 사회부 김현섭 기자(미국 헤리티지재단 연구원)는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는 취재원이 자신들이 노리던 여권내 온건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경향신문과 김기자의 집을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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