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고문사건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김근태는 의경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 2년여 동안 그는 집회가 끝난 뒤엔 늘 유언비어 유포 등의 어처구니 없는 혐의로 즉심에 넘겨지곤 했다. 그는 이번에도 민청련 총회와 관련해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는데, 이날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홀가분하게 유치장을 나섰다. 앞선 민청련 총회에서 의장직은 다른 사람이 맡기로 이미 결정된 터였다.


수사과를 지나 막 복도로 나서는 순간, 7명의 정사복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일순 스산한 한기가 전신을 덮쳤다. 마당에 나서니 시동을 켠 포니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다.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이곳 515호실에서 그 ‘짐승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가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고문자들은 김근태에게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고문용으로 제작된 칠성판 위에 내팽개쳐졌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고문의 강도를 계속 높여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들어 김근태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처음 사흘동안 그는 한 숨의 잠도, 한 숟갈의 밥도 제공받지 못했다. 사흘이 지나면서부터 고문은 더욱 포악해지고 격렬해졌다. 그는 제2의 광주사태가 진행되고 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국도 투쟁 과정에서 일정하게 존재를 인정해주던 민청련 의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일곱번째의 고문이 진행되던 중 김근태는 마침내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혐의사실을 시인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자주 만났다는 등등.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그는 제발 고통 없이 죽여 줄 것을 애원했다. 고문자들은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테니 살려달라고 하는데 너는 죽여달라고? 그래, 끝까지 반항하는 놈 깨끗이 죽여주마.”


고문자들은 포획한 먹이감을 들여다보고 시시덕거리는 승냥이들이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김근태는 9월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9월20일 마지막 고문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관순·윤동주나 광주의 영령들처럼. 그는 처참한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혼자 신음해야 했다. 기댈 언덕도, 부여잡을 풀포기도 하나 없는 황야에 버려진 것이다. 그곳은 바깥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아수라 지옥이었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는 아내 인재근을 만났다. 만남의 시간은 찰나였다.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발과 발꿈치에 난 찢긴 상처, 시꺼먼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인재근은 미처 경악하고 분노할 틈도 없었다. 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모두 담아두었다.


사실 둘은 70년대 이후 줄곧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 사이였다. 남편이 구류 마지막날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라진 뒤 행방이 묘연하자 인재근은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재근은 수사기관이란 기관을 다 찾아다녔지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졌다(한참 지난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다). 인재근은 김근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여러날째 잠복하고 있다가 이날 남편을 만난 것이다.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모두 경악했다. 그러나 그때도 모든 국내 언론은 침묵했다.


김근태는 서대문구치소 병사에 수용됐으나 변호사 접견은 물론 가족 면회도 할 수 없었다. 이돈명·홍성우·황인철 등이 변호인 접견을 신청하면 어김없이 검찰이 김근태를 불러갔다. 1차 공판 1주일 전인 12월12일에야 처음으로 공식 접견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


이‘짐승의 시간’이 만들어낸 소설같은 이야기 중 하나는 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변호인들은 12월30일 후일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진 ‘김전무’(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부르는 가명)를 비롯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8명을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검찰을 향해 대한변협은 86년 8월6일 회장 김은호의 명의로 조속한 사건 처리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나 검찰은 고발내용에 대해 무혐의 처분하는 후안무치한 결정을 내렸다.


김근태 고문사건은 그동안 아무런 연결통로 없이 각자 반독재투쟁을 벌이던 재야와 야당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 즈음 개헌투쟁의 방향과 방법을 두고 야당과 재야는 대여협상론과 전면투쟁론으로 심각한 이견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김근태. 그는 1947년 경기 부천에서 출생해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78년부터 5년여간 생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가장 평범하고 낮은 곳에서 일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상담역이 그의 직업이었다. 재학중에 유신 장기집권 반대운동을 했지만 잡히지 않고 7년 동안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 민주화운동 동료들의 공소장에는 항시 ‘공소외 김근태’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 그의 별명은 한동안 ‘공소외’였다. 또한 너무 진지해서 ‘김진지’라고도 불린다.


군사정권 하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고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이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온 것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잔혹한 고문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문 내용을 기록하다시피 머릿속 깊이 담아낸 김근태 자신의 집요함, 이를 외부세계에 정확하게 전파한 아내 인재근의 민첩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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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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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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