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의 보도지침 폭로

 


1986년 9월6일 발간된 ‘말’은 ‘보도지침’ 특집호였다. 이는 당시 우리 언론이 처한 현실을 구구한 설명없이 일거에 웅변해준 것이었다. 정부의 언론통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는 당사자 이외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5공 청와대는 문화공보부(문공부, 현 문화관광부) 내 홍보조정실을 창구로 해 매일 각 신문사로 이른바 보도지침(문공부 용어로는 홍보조정지침)을 내려보냈다. 일종의 보도통제 일일지침이었다. 이 지침은 주로 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말’의 보도지침 특집호는 85년 10월19일부터 86년 8월8일까지 약 10개월간 문공부가 하달한 보도지침을 수록했다. 국내외의 주요 사건에 대해 보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서부터, 보도한다면 그 방향과 내용, 심지어 형식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지시하고 있는 보도지침은 참으로 세밀하고도 철저하고 친절한 것이었다.


“담배 수입,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 아니다라고 쓸 것” “야당 질문내용은 빼고 ‘그저 했다’라고만 보도할 것” “고문관계는 오늘도 일체 쓰지 말 것”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부천사건’으로 쓰라” “농촌 파멸 직전 표현 쓰지 말 것” 등에서 보는 것처럼 보도통제만 한 것이 아니라 기사의 내용을 유도하는 것이 많았다. ‘눈에 띄게’ ‘크지 않게’ ‘돋보이게’ ‘균형있게’ 등의 세세한 표현도 자주 등장했다.


독재체제에서 여론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조작되고 유포되는지 소름이 끼치도록 선명하게 보여준 보도지침 특집호는 배포되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국은 즉각 전담반을 구성하고 수사에 나섰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 사무실과 ‘말’ 편집실을 수색해 ‘말’ 보관본과 특집호를 대량으로 압수했다. 당연히 관련자들은 구속을 피해 잠행에 들어갔으며 이들 모두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보도지침 특집호는 날개가 돋친듯 팔려 나갔다. 당시 언론 현실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보도지침 사례를 보자.


◇85년 10월26일=‘국회의원 미행 도청 말라’ 보도하지 말 것. 국회 야당의원 보좌관 3명 검찰 소환으로 국회 유회 공전된 것은 스트레이트 3~4단으로 보도. 스케치 기사는 안되고 해설 박스기사는 좋음. 야당 의원 의사진행, 신상발언 등을 모은 박스기사 보도하지 말 것. 이재형 국회의장 ‘정부는 국회의원 미행 도청 잠복하지 말라’는 표현은 보도말 것.


◇11월4일=NCC 고문대책위 구성 보도말 것.


◇11월5일=국회 내무위에서 전경환 새마을중앙회장이 학생들의 화염병 투척사건을 보고하고 질의에 답변한 내용은 보도하지 말 것. 서울시경, 오늘 6시 주한상공회의소 학생 난입사건의 처리방침 발표 예정. 사회면 톱이나 중간톱으로 다루지 않기를. 사이드톱 정도가 좋다고 판단. 오늘 산발적 학생시위 일일이 떼지 말고 묶어서 크지 않게 보도.


◇11월18일=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으로 쓸 것. 대학생들 민정당사 난입사건은 사회면에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구호나 격렬한 프랑카드(플래카드) 사진 피할 것. 치안본부 발표 ‘최근 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 발표문은 크게 하되 ‘적군파식 수법’이라는 제목으로 뽑을 것.


◇12월2일=예산안 변칙통과 책임은 야당에 있다. 국회 여 단독으로 예산안 통과 관련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작 바람. 여당은 정치의안과 예산안을 일괄타결하려 했으나 야측, 특히 김대중의 반대로 결렬됐음. ‘변칙 날치기통과’라고 하지 말고 ‘여 단독처리 강행’ 식으로 할 것.


◇12월19일=김근태 첫 공판 스케치 기사나 사진 쓰지 말고 공판사실만 1단으로 할 것. 국회폐회 후 정국 전망중 제목으로 ‘장외대결’ 등 표현 쓰지 말 것.


◇86년 1월15일=민정 창당대회 대통령 치사 1면 톱기사로. 이원홍 문공장관 저작권관련 발표문 크게 보도. 신민 의원 기소, 스케치 기사 여러 면에 벌이지 말고 고십(가십)으로 처리할 것. 기소 결정이 고위층과 연결된 인상 주지 말 것.


◇3월31일=고대 교수들 개헌지지 성명 사회면 1단으로. 정동성 민정 의원 국회 질의중 ‘광주 개헌현판식 사태 신민당이 군중 선동, 김영삼 김대중 야욕 버려야’ 발언은 눈에 띄게.


◇4월28일=금일부터 KBS 시청료 거부 관계 기사 및 KBS라는 표현도 일체 쓰지 말 것. 야권 지도자 회의 사진 싣지 말고 1면 톱으로 처리하지 말 것.


◇7월17일=성고문사건 검찰 조사결과 발표 내용만 쓰고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 고소장 내용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발표 이외 독자적 취재는 불가.


◇7월27일=삼척탄광 광부들 집단행동은 사회불안 요인이므로 일체 보도말도록. 미 국무성 ‘성고문사건에 개탄 표명’ 보도하지 말 것.


‘말’의 보도지침 특집호는 독립기념관 원형극장 시설이 모두 일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사전에 담당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므로 싣지 말라는 86년 8월8일자 지침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이 특집호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동안 언론이 이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러면 정권과 신문사 사이에 오간 이 비밀문건은 어떻게 세상 속으로 걸어나왔을까. 당시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현 한국언론재단 이사)은 옆자리의 편집국장이 어디서인가 걸려오는 전화내용을 받아 적어 차곡차곡 모아두는 곳을 몰래 눈여겨 보았다. 국장이 자리에 없는 날에는 자신이 직접 받아적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사 내에는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치안본부(경찰청), 문공부 등에서 나온 언론담당 관련자들이 있었으므로 직접 말로 오고가기도 했지만 정리되기로는 문공부 홍보조정실 지침이 으뜸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젊은 기자들 사이에 보도지침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비밀스러운 동조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감지한 김주언은 국장이 지침을 받아쓴 후 모아둔 것을 모두 복사했다. 그런 후에 대학 동기로 민통련에서 일하고 있는 김도연과 민언협의 이석원 등과 의논한 후 가장 폭발력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합의했다. 김도연 등은 민통련 부의장인 홍제동성당 신부 김승훈,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고 12대 국회에 진입해 있는 이철 등과 접촉했다. 그러나 신부와 야당 의원을 통한 폭로보다는 역시 언론인 단체를 통한 방법을 택했다.


민언협 사무국장 김태홍(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여러 회원들과 함께 비밀 편집실에 틀어박혀 작업에 들어갔고 이내 책자로 찍혀 나왔다. 김주언은 보도지침 특집호가 출간된 이후에도 시치미를 딱 떼고 정상적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김태홍과 신홍범(민언협 실행위원)이 체포된 이후 그도 집앞 출근길에서 붙잡혔다. 검찰과 사법부는 이들 3인에게 황당하게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해 구속했다. 침묵하는 국내 언론을 비웃듯이 미국·캐나다 등 각국과 앰네스티 등 국제단체에서 항의와 비난이 빗발쳤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 할’ 사법부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민하다가 95년에 이르러서야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이들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보도지침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이 나라 최고의 범죄집단’(김태홍의 법정진술)이며, ‘인간의 이성이 잠든 25시보다 더욱 절망적인 언론의 26시’(신홍범의 법정진술)임을 스스로 증거한 사건이다. 보도지침이 가장 많이 내려진 대상이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전체 688건 중 24.6%인 169건을 차지한 것을 보면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민주화운동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선전계몽부 장관 괴벨스가 구사한 언론통제 정책은 나치의 일방적 주장을 반복하고 보도와 선전 내용을 규제하는 데 집중됐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패전 직전까지도 철저히 보도 금지를 관철함으로써 자국과 식민지의 청년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내몰 수 있었다. 5공의 보도지침은 외국 파시즘 정권의 이같은 언론통제 전략을 유감없이 모방했다.


친일과 독재에 협력한 대가로 오늘날 천문학적 부를 축적한 언론사들이 민족지 운운하는 것은 천지신명이 분노할 짓이다. 한국 언론사에 영광이 있다면 이는 신산과 고초를 겪은 일선 기자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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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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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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