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실’ 재건과 채광석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한 문상객이 절을 하고 나서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먼저 와 있던 문상객이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다. 금세 고성이 오갔고, 말린다고 나선 이가 되레 공격의 대상이 돼버렸다. 영정 앞에서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한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줄곧 흐느끼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입구에 놓인 여당 총재의 조화를 냅다 걷어찼고, 이미 인사불성이 된 한 청년은 거기에 방뇨를 했다. 영안실 앞 잔디밭 쪽에서는 울음 섞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욕설, 고함, 방뇨, 노래, 괴성, 통곡, 멱살 드잡이, 흐느낌…. 영정 사진의 주인공이 그런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전혀 그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씨발아, 욕 좀 해! 그렇게 잘하는 욕, 왜 못해?”


정신이 있는 문상객들은 소리지르는 이의 말뜻을 능히 알아차렸다. 그래야 했다. 주인공은 침묵이 아니라 말로, 그것도 달변과 욕설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했던 것이다.


채광석(사진 왼쪽). 생 1948년 7월11일. 몰 1987년 7월12일. 서른아홉 생을 딱 하루 더 넘기기 무섭게 간 그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그날 새벽, 그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지금의 민족문학작가회의 앞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즉사였다. 사망 소식은 금세 전화선을 타고 퍼져나갔다. 잠결에 비보를 접한 이들이 정신없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문인·화가·노래패·풍물패·연극인 등 문화예술인들뿐만 아니라 재야운동 및 정당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고인이 발을 뻗쳤던 생의 테두리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80년대 문학운동의 선구자였다. 80년 5월 이른바 서울의 봄 이후 그는 순전히 과거의 전력 때문에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돼 관악경찰서, 합동수사본부, 수도방위사령부, 계엄사령부 등을 고루 거치면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복적생이었지만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둔 그는 자기보다 10살이나 아래인 ‘검은 장갑’에게 더없이 훌륭한 먹이감이었다.


“일어서! 징역까지 살고서도 아직 정신 못차렸어/이 개새꺄! 너 이 새끼 장간 들었어?/행여나 하고 예, 아이도 하나 어쩌구 하는 순간/또다시 검은 장갑은 미친듯이 춤을 췄고/완전히 뻗어버린 내 등덜미에다 그 새끼는 오금까지 박았다”(채광석 시 ‘검은 장갑’ 일부)


그렇게 당한 일이 징그러워서라도 멀찌감치 달아나고만 싶었던 그는, 그러나 결국 운동판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택한 운동은 문학이었다.


“문학은, 사람을 개나 돼지, 쥐나 염소처럼 만들어버리는 비정한 세상을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광주의 핏빛 5월을 겪고 난 이 땅에서 문학에 거는 그런 기대는 전과 다른 것이었다. 모든 것은 새롭게 조직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그 일을 맡았다. 그는 골방 속에 틀어박혀 자기 연민과 좌절 속에 헤매고 있던 문인들을 하나하나 거리로 불러내기 시작했다.”(김남일 소설 ‘길’에서)


후배 시인 김정환의 시집 ‘황색예수전’에 발문 ‘김정환의 예수’를 써서 등단하기 무섭게 그에게는 피하기 힘든 임무가 주어졌다. 제일 먼저 대학가에서 그를 찾았다. 대학 신문과 교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원고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문(文)학평론가’이어야 할 그의 직업이 ‘대(大)학평론가’로 박혀 나온, 편집자의 실수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졸지에 이 나라 유일의 대학평론가로서 그때 마침 자율화 조치로 다시 들끓기 시작한 대학가의 거센 현실참여 요구에 대해 길라잡이로서의 제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84년 가을,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임무가 부여됐다. 74년 출범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 재건에 대한 요구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이제 갓 등단한 젊은 문인들은 물론이고 ‘자실’ 창립에 앞장섰던 중견·원로 문인들 역시 하나같이 그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피하지 않았다. 그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것도 맨 앞장에 서서 싸우는 일이었다. 84년 12월18일, 마침내 ‘자실’이 재창립대회를 치렀다. 그는 가장 중요한 총무간사에 임명됐고, 그 즉시 마포경찰서 맞은쪽에 사무실을 구해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그는 새파란 후배들을 불러모아 공부 좀 하라고 다그쳤다. 그런 한편 부지런히 선배 문인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의논했다. 그의 그런 노력으로 ‘자실’은 금세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치러냈는가 하면, 작지만 씩씩한 기관지를 잇달아 펴냈고, 동인지와 지역별로 활동하고 있던 젊은 문인들을 한데 묶어내는 조직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농성과 항의방문도 주요한 사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채광석의 무기는 단연 ‘입’이었다. 몸이 견디지 못해 먹은 것을 다 토해내는 한이 있더라도 술을 마시는 입과 그런 자리에서 위 아래 가리지 않고 육두문자를 자유자재로 내뱉는 입. 어느새 그에게는 ‘문학비난가’라는 별명마저 따라붙었다.


“이러한 술판은 언제나 동지적 연대감이 충만하여 자칫 의기소침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새로운 활력과 응집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선후배가 내남없이 넘나들 수 있도록 조정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인물이 바로 젊은 평론가 채광석이었다.… 내 나이보다 일곱살 아래이고 또 그만큼 젊은 패보다 연상인 그는 젊은 패의 좌주(座主)요, 이념적 대변자로서 능란한 달변과 특유의 독설로 늘 좌중을 사로잡곤 했다.”(현기영, ‘그리운 망년우’에서)


문학적으로 그는 이른바 민중문학을 80년대의 중심적인 흐름으로 일궈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정환·김도연·황지우·홍일선 등과 더불어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고답적인 문학 행태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예를 들어 시가 골방에서 창백하게 생산돼 “자기 현시, 자기 최면, 자기 기만, 자기 카타르시스, 신선놀음, 사적 고통의 과시에 매몰”되는 현상을 질타했다. 그가 말하는 시는 민중의 노동과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했다.


“닭장에 갇힌 닭처럼 그저 주는 모이나 물을 부지런히 삼키고 이를 밑천삼아 전등만 켜져 있으면 낮인 줄 알고 밤이건 낮이건, 홰를 치고 울어 때를 알릴 생각은 접어두고, 노른자위 멀건 껍질 야리야리한 시만 기계적으로 뽑아내다 보면 항문인들 성할 것이며 폐닭이 될 날 또한 그리 멀 것인가? 무릇 닭은 때를 알리며 홰를 치고 울 줄 알아야 참닭인 것이다.”(채광석 평론, ‘시를 생각한다’에서)


이런 생각으로 무장한 그였으니 선배 작가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투쟁에 앞장서야 할 선배들이 상황을 핑계로 잠시 주춤거리면 여지없이 독설을 퍼부어댔다. 꼭두새벽에 난데없이 그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선배 작가들이 하나 둘은 아니었을 터.


그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결집에도 앞장섰고, 문화운동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조직을 꾸려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 결과, 어디에서나 그를 볼 수 있었다. 최루탄이 터지는 거리, ‘짭새’들이 우글거리는 재야운동 단체의 현판식장, 미술판, 노래판, 풍물판, 마당극판, 하다못해 대학생들의 술판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꼭 가운뎃사람이었다. 여기저기 가운데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을 떠맡았다. 말하자면 그는 언젠가 도둑놈, 소매치기, 앵벌이, 깡패, 물총, 포주와 자신을 한데 엮어주던 그 굵은 동앗줄 같은 사람이었다.”(김남일 소설 ‘길’에서)


그런 그가 6월항쟁의 뜨거웠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돌연 사람들 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민족시인 고 채광석 민주문화인장’으로 성대히 치러졌지만, 훗날 민주화운동이 갈피를 못잡고 비틀거릴 때마다 지인들은 그의 부재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는 슬퍼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모든 사람이 맞는 죽음을 누구보다 어이없이 죽었다/그의 무덤엘 가면 역사가 된 바람이/그의 결석을 인정치 않으려는 우리들의 뺨을/세차게 후려친다 그리고 얼얼한 우리 뺨이 소리친다/그건 네 탓이다, 네 탓이다”(김정환 시 ‘채광석’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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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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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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