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전’ 탄압과 민미협 탄생

 


1985년 7월 초 어느날. 미술동인 두렁의 멤버인 정정엽의 화실에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두어 시간 전 우연히 화실에 들렀던 누군가가 신고를 했던 것이다.


“아니, 정말이네? 세상에!”


형사들은 한편으로는 어이없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 건’ 했다는 희열감으로 자못 들떴다. 그들은 화실을 가득 메우다시피한 대형 그림들을 하나하나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는 전태일이 보였고, 앳된 여공들이며 힘차게 팔을 내뻗은 노동자, 격렬하게 무엇인가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나같이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들이었다. 그 무렵 벌어진 구로 동맹파업을 지원할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화실의 주인 정정엽은 그림들과 함께 경찰서로 끌려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두렁 동인은 일제히 경찰서로 몰려갔다. 그들은 이미 몇 번이고 경찰서를 들락거린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문에서 막아서는 전경의 제지쯤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경찰서 안에서 책상을 탕탕 쳐가며 항의했다.


“이거 당신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 사유재산을 이렇게 도둑질해 가도 돼? 게다가 표현의 자유를 이렇게 함부로 짓밟아도 돼?”


법을 수호해야 하는 경찰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정정엽과 그림을 고스란히 내뱉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난 지 며칠 후인 7월13일, 종로의 아랍미술관. 서울미술공동체가 주최하는 야심찬 기획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름하여,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하 ‘힘전’). 그들은 이 전시에 이어 30대의 ‘힘전’도 연달아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 전시회에는 모두 35명의 작가들이 출품했다. 앞서 수난을 당한 바 있는 두렁의 노동운동사 작품을 비롯해 출품작들은 하나같이 현실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삼았다. 기획자들은 취지문에서 선동구호적인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을 청산하고 민족의 현실문제를 민중적 정서와 미의식으로 형상화해낸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 관객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런 취지문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작품은 지극히 민중 이데올로기에 기울어 있었다. 그게 오히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은 연일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전시 여드레째인 7월20일 오후 1시. 종로경찰서 형사 5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전시 중단을 요구했다. 기획자들은 그런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전시 중인 그림들을 거칠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기획자와 화가들이 달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형사들은 오후 5시로 예정된 세미나를 취소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기획자들은 당연히 그것마저 거부했다.


오후 5시 무렵, 미술관 밖에 전경들이 대거 투입됐다. 그들은 출입문을 봉쇄한 채 관람객들의 출입을 저지했다. 아울러 안에서는 대대적인 작품철거가 시작됐다. 그들은 작품들을 마구 뜯어냈다. 몇 안 되는 주최측 인사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쪽 벽으로 달려가더니 한 그림을 후두둑 훑어내렸다. 훗날 만화 ‘반쪽이’로 유명해진 최정현의 엽서 연작그림이었다. 최정현은 군대에 가 있었다. 그는 전시회 소식을 듣고 커다란 그림을 구상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화폭에 제대로 그려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궁리 끝에 엽서를 이용해 마치 조각 그림 그리듯 그려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어쨌든 기획자들은 다른 누구보다 군대에 가 있던 최정현만이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데 퍼뜩 생각이 미쳐 그렇게 작품을 흩뜨려놓은 것이다.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탄압을 본격적으로 맞이한 셈이기 때문이다. 오후 7시 김봉준·최민화·홍성담·문영태·최열·김주형·라원식 등 출품작가와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힘전 탄압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튿날 전시장 폐쇄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현장에서 19명의 작가와 관람객들을 연행했다(‘힘전’ 전시 기획자인 서울미술공동체의 손기환·박진화와 두렁의 김우선·장진영·김준호 등). 그들 중에는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 구경을 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심상찮게 돌아가는 분위기 탓에 다소 겁을 집어먹은 이들도 생겨났다. 미술운동판으로서는 다소 드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경찰서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한 청년이 경찰서 입구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쳐들어왔다’. 민청련의 연성수였다. 그는 문화운동연합 소속이면서 동시에 두렁 소속 화가 이기연의 남편이기도 했다.


연성수는 ‘조폭’이었다. 경찰서 정문에서부터 그는 자기 옷을 박박 찢으며 고함을 쳤다. 그러면서 아무 데고 머리를 들이박았다. 이건 도대체 지성있는(?) 민주화운동가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지만, ‘전투적인 현장’에서는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경찰서 안에서 다소 풀이 죽어 있던 연행자들은 연성수의 조폭 같은 등장에 고무됐다.


‘아,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까짓것! 우리라고…’


‘힘전 탄압대책위’는 24일 이름을 ‘민중미술탄압대책위’로 바꾸었다. 농성과 연대항의 성명발표가 이어졌다. 당국은 연일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방송을 통해 붉은 색조의 화면을 바탕으로 깔고 전시됐던 그림들의 문제성을 집중 부각시켰다. 공식적으로 그들이 문제 삼은 작품은 손기환의 ‘타! 타타타타!’와 박영률의 ‘비극의 역사, 80·5 광주’, 박불똥의 ‘1980·5·17일생’ ‘핫라인’ ‘경찰의 감시 아래 서울 목동 주민들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다’, 김우선의 ‘이불을 꿰매면서’ ‘김의기 열사 신장도’와 앞서 언급한 두렁의 노동운동사 연작도 등 총 26점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엄청난 반발과 여론의 악화를 우려, 결국 연행된 작가 일부에 대해 유언비어 유포죄를 적용, 경범죄로 축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힘전’은 80년대 미술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비록 경찰에 의해 촉발된 사건에 대응하는 반사적인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이어져오던 미술판의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결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8월에 민족미술 대토론회가 열렸다. 그 결과 11월22일 ‘건강한 민족문화의 건설과 민주화운동에 적극 기여한다’는 목표를 내세운 거대한 미술운동조직 ‘민족미술운동협의회’(민미협)가 결성됐다. 민미협은 80년대 초반의 ‘현실과발언’ 동인, 광주자유미술인협회, 임술년 동인을 비롯한 다양한 현실참여적 미술운동의 결집체였다.


‘오늘의 민족미술은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공동체적 삶의 실천에 동참하면서 예술·문화의 발전에 참답게 기여하는 창의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새로운 역사의 전환기에 서서 민족미술이 요구하는 과제를 알고 있는 우리는 뜻을 같이하여 이 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창립선언문은 ‘제도미술은 진정한 삶과 미술의 기능을 분리하여 삶의 소외와 수용의 단절을 극대화시켰으며 비판의식을 거세한 현실의 미화작업을 순수주의·심미주의·예술지상주의·현대주의 등 온갖 형식미학의 논리로써 자기 보호의 틀을 만들기에 급급하였다. 또한 전통미술의 본질을 왜곡하여 민중이 담당한 역할을 무시하였고 서양미술의 추세를 기준삼아 이의 추종방식이 전통과 현대의 결합인 것처럼 선전하는 정예주의·외세주의 발상을 풍미하게 하였다. 온갖 형식주의가 난무하는 화단의 폐쇄적 풍토 위에서 미술인구는 증가하여도 모순의 혼란을 헤쳐 나가려는 돌파구가 막혀 있는 상태’라며 기성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린 창립대회 이후 민미협은 인사동에 전용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86년 2월 개관)을 두어 정권의 탄압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이어 86년 7월에는 기관지 ‘민족미술’을 창간하고, 8월에는 제1회 ‘통일전’을 개최하는 등 민미협은 명실상부한 진보적 미술인들의 운동단체로서 역할을 해 나갔다.


당연히 당국의 탄압도 거세졌다. ‘깡순이 작가’ 이은홍 구속사건, 신촌벽화 및 정릉벽화 파괴사건 등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그러나 민주화 대열에 합류한 민미협의 대응은 신속하고도 굳건했다. 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시기에 걸개그림이나 판화·만화 등을 통해 미술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런 조직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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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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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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