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깃발아래선 누구나 평등하다”


“역사란 도대체 뭐예요?”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역사를 위한 변명’을 썼다. E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역사란 진정 무엇인가.’ 매주 목요일 본지에 연재되는 ‘이이화의 우리 역사 바로보기’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선다. 이씨는 40년간 동양고전과 우리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로 최근 ‘한국사 이야기’를 완간했다.

 

- 근대국가 지향한 동학농민전쟁 ① -

 

일제는 동학농민군을 모질게 탄압했다. 그런데도 식민지 시기, 전봉준의 애달픈 죽음을 노래한 동요 ‘파랑새’는 부녀자와 어린애의 입으로 불려 골골에 메아리쳤다. 근래에는 조수미가 개작 편곡한 ‘파랑새’를 불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죽음은 민족의 한으로 우리네 가슴속에 오래 응어리졌던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에는 농민군 1백만명이 참여했고 3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산속이나 섬으로 도망해 몸을 숨겼고 죽음을 면한 처자식은 재산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사자나 가족은 살아가면서 결코 농민군에 가담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말하지 않았다.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록의 계절인 5월은 동학농민전쟁의 단초를 연 달이다. 1894년 연초에 고부(현 전북 정읍)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는 부안의 백산대회를 거쳐 5월10일(음력 4월6일) 전라감영에서 파견된 관군과 향병(鄕兵)을 일거에 쳐부쉈다. 이어 5월25일 장성 황룡강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여 일대 승리를 장식하고, 승승장구한 끝에 전주로 내달아 5월31일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농민군이 한 도의 수부를 점령한 것은 조선조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더욱이 전주는 국가재정의 4분의 1을 담당하는 호남의 심장부였기에 그 파장은 더욱 컸다. 이렇게 하여 온 나라를 미증유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근대사의 새 장을 연 농민전쟁의 횃불이 올려졌다. 농민군들은 전주에서 관군 대장인 초토사 홍계훈과 몇 가지 중요한 약속을 하고 집강소(執綱所) 활동을 전개했다.

 

농민군은 첫 봉기 때부터 정부의 비정을 지적하는 글을 보냈으나 전주를 점령한 뒤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농민군의 요구는 국가제도로 이루어진 비정, 곧 국가수탈을 중지할 것이며, 모든 벼슬아치의 부정행위를 척결하고 쌀의 외국 유출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관군과 농민군은 서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주에서 물러갔던가?

 

-집강소 설치지역 ‘해방구’-

 

간단히 분석하면 관군은 서울에 일본군과 청군이 진주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농민군은 북접(北接·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지역의 동학 조직. 전라도 지역은 남접이라 했다)의 호응이 없어서 고립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관군과 농민군은 각기 이해득실에 따라 타협을 하고 다음의 정세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내건 강령을 실천했다. 집강소는 국가에서 임명한 수령들을 몰아내거나 하수인으로 부리면서 지방행정의 직접 통치를 이룩했다.

 

집강소를 통해 수행한 주요 조항을 보면 신분관련 조항으로는 ▲유림과 양반무리의 소굴을 없애버리는 일 ▲종의 문서를 없애버리는 일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하는 일 등이었다. 국가수탈 문제로는 ▲모든 부당한 조세를 중지하는 일▲무명 잡세를 없애버리는 일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토지문제로는 토지를 고루 나누어 짓게 하는 일 등이며, 여성문제로는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는 일 등이었다. 또 외국세력과 결탁하는 자들은 잡아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오지영의 동학사 필사본)

 

이를 폐정개혁이라 부른다. 조선왕조는 신분제도와 토지제도를 골간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다시 말해 양반과 상인을 가르고 노비와 천민을 최하층으로 하여 양반(사림) 중심의 관료사회를 이룩했던 것이다. 온갖 특권을 누린 양반들과 달리 양인들은 국가조세와 군대경비를 부담하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천민들은 갓을 쓰지 못하고 패랭이를 쓰거나 맨상투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며 양반의 부당한 부림을 받아야 했다.

 

또 토지 소유를 무한정하게 허락하여 양반과 지주들은 수천석, 수만석의 잉여생산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소작인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물렸다. 따라서 소작농들은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는 사태가 연이어졌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농지소유를 제한하려는 정책이나 소작료를 낮추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

 

소농민들과 하층민들은 이런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오랜 투쟁을 벌여왔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지배세력은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완강하게 이를 개혁하지 않으려 했다. 농민군들은 집강소 활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노비들은 종문서를 불태워버리고 해방되었으며, 백정들은 패랭이를 벗어 던지고 양민과 같은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 또 자작농과 소작농은 과도한 소작료나 고리채를 물지 않거나 부당한 국가수탈에 저항했다. 집강소가 설치된 지역은 바로 해방구였다.

 

또 집강소는 합의에 의해 조직을 결성하고 당면의 정책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집강소 관계자와 일반 민중에게는 서로의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했다. 곧 부인접장(여성), 동몽접장(어린이) 등 신분과 남녀와 나이를 떠나 동등한 호칭을 사용케 하여 사민(四民)평등의 의지를 드러냈다. 상하와 존비와 남녀의 차별관념을 타파하려는 평등의 호칭이었다. 접장 호칭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 뒤 ‘동무’라는 호칭을 쓴 시기보다 적어도 20여년 앞섰다.

 

이해 7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이른바 개화파를 등장시켜 갑오정권을 탄생시켰다. 갑오정권은 개혁조치로 ▲문벌과 반상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뽑아 쓴다는 것 ▲부녀의 재가(再嫁)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것 ▲모든 노비제도를 없애는 것 등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조세와 토지제도의 개선 등 국가수탈과 지주수탈의 조항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 이는 신분제도는 개혁하되 민중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제도의 개혁은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까 개화정권이 추진한 갑오개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조치였다.

 

-남녀노소 떠난 호칭 ‘접장’-

 

농민군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6개월쯤 집강소를 통해 반봉건투쟁을 줄기차게 벌였으며 충청도, 경상도로 번져나갔다. 신분평등과 토지개혁은 바로 근대국가가 지향하는 기본 요소이다. 바로 신분제적 계급을 해소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철폐하며 대의제를 이룩해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여는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본질을 호도한 개화정권의 지향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하여 집강소의 합의적 의사결정과 평등실현의 활동을 두고 아시아 민주주의 맹아(萌芽)라 평가하기도 하고 밑으로부터 변혁을 지향하여 근대국가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제공한 반봉건 투쟁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이이화/역사학자〉

 

- 2남 2녀둔 전봉준, 농민전쟁뒤 절손 -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송씨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부인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했다고 한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혔다. 곧 본인 부부를 포함해 자녀를 4명 두었다는 말이다.

 

전봉준이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부 조소리에서 살 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황토재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성묘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해주고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주소지를 태인 동곡리(현재 정읍시에 속함)라고 밝혔다. 아마도 고부봉기가 있은 뒤 가족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 4명이 태어난 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2남2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최현식 조사)

 

전봉준이 체포된 뒤 전봉준의 고향으로, 전씨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고창 당촌은 깡그리 불에 탔고 전씨들도 몰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준의 첫딸 옥례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이름을 바꾸고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들어가 공양주로 있었다. 그녀는 23세 때 이씨 집안으로 출가했는데, 1970년 자신이 살았던 고부의 전봉준 고택을 일러주어 복원케 했다.

 

둘째 딸은 뒤에 태인 지금실로 출가해 살고 있었다. 장남 용규는 동곡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남 용현(또는 동일)은 누나가 사는 지금실에서 몸을 숨겨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금실에는 동네사람들이 전봉준의 가묘를 만들고 받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현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네에서 노름을 일삼다가 노름빚을 져서 남의 소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의 두 딸은 살아남아서 자식을 두었다. 외손녀인 강금례는 동곡리에 살면서 자식을 두었다.

 

전봉준은 외손을 둔 것으로 보이나 친손들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봉준만이 절손이 된 것은 아니다. 많은 농민군 지도자들의 가족이 몰살이 되거나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지난 2월 국회에서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110년 만에 농민군 지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주는 훈장이나 표창장은 누가 받아 보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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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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