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투항’ 강홍립 후금침입때엔 강화주선
강홍립은 후금에 10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다. 평안감사 박엽은 처음 그가 투항했을 때 그를 역장(逆將)이라 하여 의주에 있던 그의 처자를 감옥에 가두고 조정의 조치를 기다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의 처자를 서울로 불러올려 생활을 돌보며 특별히 환대했다.
그는 인질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고국에 정보를 연달아 보냈다. 1626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죽고 난 뒤 태종이 즉위했다. 태종은
조선정벌을 서두르고 있었다. 1627년 왕자 아민(阿敏)을 시켜 조선을 정벌했다. 아민은 강홍립과 박난영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나왔다. 장만이 적진으로 나와 교섭의 일을 보았다.
강홍립은 다급하게, 장만에게 “내 질긴 목숨이 아직 죽지 않고 살면서 오직 평화를 바랄 뿐이다. 입으로만 따져서는 해결될 수 없다. 특별히 진실한 호의와 예물을 후하게 보내서 호병(胡兵)을 퇴각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일 것이다”라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후금의 정세를 요로에 알려 강화를 주선했다. 강홍립의 이런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인조는 우여곡절 끝에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 조건은 말할 나위도 없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척화파들의 반대는 거셌으나 정세는 너무 절박했다.
강화조약을 맺은 뒤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 강홍립의 병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가 고향 땅 시흥에서 은인자중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역신이라고 비난하면서 죽음을 내려야 한다고 떠들었다. 인조는 차마 죽음을 내리지 않고 벼슬만 떼어버렸다.
강홍립은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인조는 벼슬을 복구시키고 초상 비용을 내리게 했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다시 벌떼처럼 일어나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그 조치를 철회했다.
강홍립의 후손들도 온갖 핍박을 받았다. 역적의 후손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았다. 더욱이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강홍립의 시문집을 관악산 연주암 주변에 묻었다. 이 문집은 영영 찾을 수가 없었다.
1990년대 시흥 난곡에 있는 그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시신은 6척 장신이었다고 하며 시체가 거의 부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경업은 황해 일대에서 사라져 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워서 충신으로 받들어졌으나, 국익을 위해 활동한 강홍립은 역적의 누명을 썼던 것이다.
=-=-=-=-=-=-=
[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6월 09일]
'과거 자료 > 여기저기 퍼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바로보기] 05. 진상규명 요구 유족 수감 (0) | 2005.03.03 |
---|---|
[한국사 바로보기] 04. 明 출병요구와 광해군 등거리 외교 (0) | 2005.03.03 |
[한국사 바로보기] 02. 임진왜란인가, 조일전쟁인가 (0) | 2005.03.03 |
[한국사 바로보기] 01. "녹두장군 깃발아래선 누구나 평등하다" (0) | 2005.03.03 |
[실록 민주화운동] 92. '통일의 꽃' 임수경 (0) | 2005.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