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이야기 11] 국적없이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축구
[1948년 올림픽] 한국 축구, 세계 무대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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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없이 참가한 올림픽 축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7월 29일 - 8월 14일). 전쟁의 기간 동안 축구는 더욱 대중적 스포츠로 발전하였으며, 1948년 올림픽 축구경기에 18개 나라가 도전장을 냈다. (룩셈부르크, 아프가니스탄, 아일랜드, 덴마크, 이집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인도, 유고슬라비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한국, 멕시코, 이탈리아, 미국, 터키, 중국)
이들 중에 한국은 아직 정식으로 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상황으로 참가 자격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기 때문에 제14회 올림픽 기간에는 국가의 존재가 인정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대한민국의 출전을 허락했다.
#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한국에서 축구는 식민지 시절부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 한국은 대표팀을 구성하여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런데 대표팀 구성에 있어서 마찰을 빚으며 감독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이 구성되었지만 2개월 정도를 허송세월로 보낸 것이다.
영국에 도착한 한국 선수단은 먼지가 가득 일어나는 흙으로 된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영국의 공군팀, 경찰팀과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경기 감각을 익혔는데, 특별히 다른 참가국 중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연습 경기에서는 6-0으로 승리하기도 했다.
한국팀으로서는 영국 경찰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주전 골키퍼 차순종이 허리 부상으로 본선 무대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후보 선수였던 홍덕영으로 문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홍덕영으로서는 좋은 기회였지만, 동시에 세계의 강호들이 겨루는 올림픽에서 골문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갖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선수들에게 골키퍼는 별로 선호의 대상이 못되었다. 축구를 웬만큼 잘하는 사람들은 공격수가 되었고, 골키퍼는 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선수가 담당하는 자리로 여겨졌던 시대, 홍덕영 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골키퍼가 되었다.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 면담을 하던 도중,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적은 골키퍼를 선택한 것이 그의 축구 인생을 결정한 것이다.
# 첫 승의 감격과, 패배의 슬픔
한국은 8월 2일, 북중미의 멕시코와 역사적인 첫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경기장에 등장하면서 비단결 같은 잔디구장에 매료된 한국 선수들은 맨발로 잔디를 밟아보기도 하였는데, 먼지가 가득 일어나는 흙으로 된 운동장에서 연습을 해온 한국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비단 위를 걷는 듯 했다고 한다.
한국의 상대인 멕시코는 기술과 전술적인 면에서는 한국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상대적으로 몸싸움을 싫어하는 멕시코 선수들의 플레이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공격수들이 다섯 골을 넣었고(최성곤, 정국진 2골, 배종호, 정남식),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대신 골문을 지킨 홍덕영이 세 골만을 허용하면서 5-3으로 승리하고 8강이 겨루는 두 번째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한국의 8강 상대는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비록 12년 전에 아시아의 일본에게 2-3으로 패한 바 있지만, 실력과 체력면에서 한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비록 이기긴 했지만 체력 소모가 컸으며, 장비적인 면에서 다 낡고 헤진 축구화를 신고 비가 오는 가운데 경기를 치러야 했다.
방수도 되지 않은 축구화는 비를 맞아 무거워졌고 선수들은 빗속에 미끄러워서 제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국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0-12라는 엄청난 점수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조건에서 싸웠더라도 기술이나 전술, 체력적인 면에서 한국을 압도한 스웨덴에게 최소한 다섯 점 이상은 내주었을 것이다.
한국의 골키퍼 홍덕영은 이날 열 두골을 스웨덴에게 허용했다.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는 국가대표의 불명예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패배의 일차적 원인으로 오늘날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은 당시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강팀이었으며, 12골을 허용한 이 경기에서 스웨덴의 유효슈팅은 48개에 육박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홍덕영의 선전은 박수받을만한 일이었다.
#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한국 축구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한국으로서는 멕시코를 격파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했지만 스웨덴에게 무참하게 깨지면서 높은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빈약한 자료를 토대로 해방 전후의 한국 축구를 살펴보면, 꽤 유능한 선수들이 한국 축구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축구에서 세계 정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지만, 그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시스템과 인재를 키울 수 있는 주변의 상황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을 거쳐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전까지 한국 축구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하고, 어이없는 성적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축구에 대한 투자는 뒷전으로 하고 오로지 경기의 승패에만 집착하여 축구대표팀을 평가하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사정없이 난도질을 가하기도 했다.
스포츠에서 처음부터 정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좌절과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인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에 참가한 초창기 한국의 축구는 비록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나름대로 소중한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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