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야기 4] 월드컵 첫 2인자, 아르헨티나
[제1회 월드컵] 승리의 여신에게서 외면당한 아르헨티나
=-=-=-=-=-=-=
1) 남미의 또 하나의 자존심, 아르헨티나
제1회 월드컵이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개최되면서, 유럽의 강호들이 대거 불참했기 때문에 남미 팀들 중에서 챔피언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개최국이자 올림픽 축구 2연패를 자랑하는 우루과이는 우승후보 0순위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월드컵 챔피언이 되겠다는 우루과이의 야망에 결코 뒤지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철벽 수비를 자랑하는 우루과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아르헨티나는 비록 올림픽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남미에서는 우루과이와 쌍벽을 이루는 팀이라는 자부심에 똘똘 뭉쳐있었다.
당시에 두 팀이 그라운드에서 만난다면, 아무도 승리를 쉽게 장담하지 못하였는데, 월드컵이 열리기 전인 1920년대 남미 축구의 챔피언을 가리는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 양팀은 똑같이 4차례식 우승컵을 나눠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루과이로서는 남미에서는 항상 껄끄러운 상대인 아르헨티나를 견제해야 했고, 아르헨티나는 올림픽 챔피언 우루과이를 뛰어넘어야 했다.
2) 조별리그, 프랑스 전
남미를 뛰어넘어 세계의 강자로 인정받으려는 아르헨티나로서는 조별 리그에서 만난 프랑스, 멕시코, 칠레를 따돌리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아르헨티나의 플레이는 상당히 거칠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 중심에 몬티가 있었다. 그는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에 몰입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기 때문에 상대 선수들과 많은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5일, 아르헨티나가 처음 만난 상대는 개막전에서 멕시코를 4-1로 완파하고 사기가 올라있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선수들은 낯선 기후 속에서도 아르헨티나를 맞아서 선전했다. 이날 경기를 관람하던 우루과이 국민들은 내심 프랑스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날도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는 몬티의 거친 행동으로 프랑스 선수들(로랑, 마쉬엥노)은 부상을 당하는 등 경기가 상당히 과열되어 있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후반 종료 10분, 프리킥을 골로 성공시킨 몬티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1-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만회골을 넣기 위해서 프랑스가 공격에 치중하려는 순간,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프랑스 선수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내심 아르헨티나가 지기를 바라는 관중들도 프랑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그제야 주심은 다시 선수들을 불러 모아서 경기를 재개하였다. 경기 종료 직전 프랑스의 로랑이 동점을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었지만 골은 골대를 맞추면서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대부분 승자보다는 패자가 경기에 대해 아쉬움이 많은 편이다. 이 경기에 있어서도 프랑스는 상당한 아쉬움을 표했다. 만약 경기가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가 동점골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우루과이 국민들도 그런 프랑스의 아쉬움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마치 아르헨티나가 심판의 도움으로 승리한 것처럼 아르헨티나의 승리에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이기고도 떨떠름한 기분을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국민들이 행동에 불만을 품게 되고, 대회의 보이콧까지 고려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나머지 경기를 치르게 된다. 아마도 아르헨티나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패자에 대한 동정심은 순간적이고, 승자에 대한 영광이 훨씬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조별리그, 멕시코 전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상대는 칠레에게 0-3으로 패한 북중미의 멕시코였다. 이 경기 전에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페레이라는 학기말 시험을 보기 위해서 고국으로 떠나버린다. 오늘날 같으면 도저히 납득할 상황이 아니겠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능했던 일이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보다 관광을 목적으로 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초기의 시절이다.
아르헨티나의 감독은 학기말 시험을 보기 위해서 팀을 떠난 페레이라를 대신해서 기용된 스타빌레를 기용했다. 그리고 주심이 너무 엄격하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전에서 맹활약(?)한 몬티를 쉬게 했다. 이러한 감독의 용병술에 대해서 스타빌레는 헤트트릭으로 보답했다. 그러나 감독은 스타빌레의 활약보다는 경기를 쉬고 있는 몬티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이날의 경기는 심판이 너무 자주 휘슬을 부는 바람에 경기의 흐름이 자주 끊겼고, 만약 몬티가 출전했더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날의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스타빌레의 헤트트릭에 힘입어 멕시코를 6-3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이날의 승리 또한 심판의 편파 판정이 한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에 심판을 맡았던 볼리비아 주심은 흥분한 관중들에게 쫓기다가 경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4) 칠레와의 난투극
아르헨티나의 조별 리그 마지막 상대는 기예르모 수비아브레의 활약에 힘입어 멕시코를 3-0으로 격파하고, 프랑스까지 1-0으로 누른 칠레였다. 올림픽 축구의 스타였던 헝가리의 게오르규 오르트(Gheorghe Horst)가 지휘봉을 잡은 칠레 역시 맹 훈련을 통해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똑같이 2승을 기록하고 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경기의 승자가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챔피언을 향한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반전은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의 두 골과 이에 맞선 칠레의 영웅 수비아브레의 한 골로 2-1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프랑스전의 영웅(?) 몬티가 다시금 거친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칠레의 토레스의 엉덩이를 걷어찬 몬티는 2분 뒤, 토레스의 보복으로 이마를 얻어맞고 피를 흘렸으며 결국 양 팀의 선수들이 치고받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난투극이 진정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을 때, 아르헨티나의 에바리스토가 한 골을 추가했고(51분) 결국 3-1로 승리한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5)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조별리그를 치르면서 아르헨티나의 플레이는 실력에 비해서 거친 플레이로 상대팀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축구 팬들은 아르헨티나와 상대한 팀들에게 동정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축구 팬들은 아쉽게 탈락한 팀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러한 동정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축구팬들의 관심은 약육강식의 토너먼트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월드컵에서 최후의 승자는 모든 조명과 박수를 한 몸에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월드컵이 공을 가지고 치르는 전쟁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6) 준결승전, 미국 완파하고 결승으로!
7월 26일,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3-0, 벨기에를 3-0으로 완파하고 D조의 1위로 올라온 미국과 맞붙게 되었다. 미국은 체격 조건이 월등한 선수들로 구성했는데, 스코틀랜드에서 프로 생활을 하는 선수들이 다섯 명이 포함될 정도로 용병의 팀이었다. 월등한 체격 조건으로 선발된 미국의 강점은 뛰어난 스피드에 있었다.
이러한 미국을 맞이하여 아르헨티나는 전반전에는 한골(몬티, 20분)밖에 넣지 못하고 1-0이라는 아슬아슬한 스코어를 기록하였다.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는 다섯 골을 성공시키며(스코펠리 1골, 스타빌레 2골, 페우첼레 2골) 경기종료 직전 브라운이 한 골을 만회한 미국을 최종 스코어 6-1로 완파하고 결승전에 선착했다.
아르헨티나가 미국을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팀 닥터 레이놀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 도중 아르헨티나의 사고뭉치 몬티가 미국의 브라운을 걷어차 브라운이 쓰러지자 경기장에 들어간 레이놀즈가 클로로포름이 든 약병을 깨뜨렸고 클로로포름의 냄새가 미국 선수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이후 이상하게도 미국 선수들의 약 기운 때문인지 활기찬 모습을 잃어버렸고 연거푸 다섯 골을 실점했다는 후문도 있다.
7) 숙명의 결승전, 최후의 승자와 패자
결승에 진출한 아르헨티나의 상대는 유럽의 자존심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완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영원한 숙적 우루과이였다. 아르헨티나로서는 1927년, 1928년 코파아메리카 대회에서 우루과이를 꺾으면서 우위를 차지하는 듯 했으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에서 우루과이에게 1-2로 패하며 세계 무대에서는 다소 밀리는 듯한 이미지를 털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1930년 7월 30일,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경기장에 9만 3천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홈 팬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전반 12분 파울로 도라도가 선취골을 성공시켰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아르헨티나의 페우셀레(20분)와 길레르모 스타빌레(37분)가 연속으로 골을 성공시켜서 앞서 나갔다.
전반전을 2-1로 리드한 상황에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경기의 공정성을 위해서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의 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익숙한 공 때문인지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후반 13분 세아의 동점골, 23분 이리아스테의 역전골이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공략했고, 후반 종료 직전 카스트로가 아르헨티나의 추격에 쐐기를 박는 골을 성공시켰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처음의 결승전에 초대받았지만 2-4로 패하는 바람에 우승의 영광을 우루과이에게 넘겨주었다. 대부분의 패자들이 그러하듯 아르헨티나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거친 플레이와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게서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찾았다. 아르헨티나는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거칠게 행동했던 자신들의 모습은 기억하지를 못했다. 아니, 기억하기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결승전 당일에는 홈그라운드의 우루과이가 자신들보다 덜 신사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쩌면 승리의 여신은 첫 월드컵 우승의 주인공으로 아르헨티나보다는 우루과이가 더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는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우승을 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팀이었지만 조별리그를 거치면서 보여준 플레이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주관적으로 자신들이 억울하게 패한 희생자라는 생각을 유지했다.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승리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이렇게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결국 인접한 두 나라가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
오마이뉴스에 올립니다.
'과거 자료 > 월드컵 축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제1회 월드컵 : 축구의 변방, 미국의 4강 신화 (0) | 2007.05.31 |
---|---|
[5] 제1회 월드컵 : 유고, 유럽의 자존심을 지키다 (0) | 2007.05.31 |
[3] 제1회 월드컵 : 우루과이의 영광 (0) | 2007.05.31 |
[2] 제1회 월드컵 : 초라한 시작 (0) | 2007.05.31 |
[1] 월드컵, 승자의 미학 (0) | 2007.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