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 유신의 만행 세계에 전하다
‘세카이(世界)’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학술잡지이다. 이와나미(岩波) 출판사가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창간하여 지금까지 통권 720여호를 발간하고 있는 매우 생명이 긴 잡지이다. 일본 지식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외국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자주 기고하는, 품격과 대중성을 함께 갖춘 매체로서 국제사회의 각종 현안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장이다.
‘세카이’는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73년부터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88년까지 군사정부 시절 15년 동안 매달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하 ‘통신’)을 게재했다. 제1신(73년 5월)에서 176신(88년 3월)까지 ‘통신’이 계속되는 동안 누군가가 군부정권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뚫고 한국내 폭압통치의 실상과 저항세력의 온갖 시시콜콜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는 거꾸로 국내로 들어와 관제언론이 한 줄도 다루지 못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통신’의 필자로 되어 있는 ‘T·K생’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짐작건대 ‘T·K생’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일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전하는 내용의 풍부함과 정확도에 비추어 집단 창작이 분명해 보였다. 또 정보전달의 신속성으로 보아 국내
민주화운동세력과 직접 연계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일본뿐 아니라 서구와 동남아 등지로 널리 퍼져나간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이 믿을 만한
자료는 준계엄령 상태하의 한국실상을 박진감있게 전하는 유일한 해외언론이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지나고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인 2003년 7월에야 이 ‘통신’과 관련한 비사들을 당사자들이 직접 공개하기
시작했다. ‘통신’의 필자는 오랫동안 일본 도쿄여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 KBS 이사장을 역임한 지명관이다. 그는 ‘통신’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자료를 반출해준 국내 민주화운동가들과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준 해외의
‘기독자민주동지회’라고 밝혔다.
초창기 ‘통신’의 주된 자료가 된 것은 무엇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가 주간으로 발간하는 ‘인권소식’을 비롯한
각종 민주화운동 소식지와 사진물, 녹음·녹화물 등이었다. 그때 ‘인권소식’은 사전검열로 인하여 재갈이 물려 있는 국내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는
민주화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는 국내 유일의 대안적 매체였다. ‘인권소식’ 제작 실무를 맡은 사무국장 이경배가 자료 반출의 총책이었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에 파견된 독일 선교사 슈나이스 목사가 보내주는 인편으로 매달 통신의 원자료를 부쳤다.
70년대에는 유럽 각 도시로 가는 직항로가 많지 않던 때라 대부분의 유럽 여행객은 도쿄를 경유해야 했다. 슈나이스는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교사, 유치원 보모, 학생, 단순 여행객 등 그때그때 물색한 다양한 직종의 남녀노소가 슈나이스의 부탁으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907호에 들러 이경배로부터 자료를 받아 도쿄로 갔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가는 물건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이경배 또한 그들의 신원을
알 필요가 없었다. 슈나이스는 동일인의 잦은 출입이 혹시 수사망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매번 사람을 바꾸었다.
윤수경(현 사회복지공동모금 사무총장)은 이경배에 이어 ‘인권소식’ 실무를 맡고 있던 남편 박종만(동아일보 해직 기자)이 긴급조치로
구속되자 79년 초부터 이를 물려받아 일하게 되었다. KNCC 총무 김관석은 한 달에 한두 번 무심한 표정으로 얼굴이 생소한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와 윤수경에게 아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이 “이 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녀는 준비한 성명서나 투쟁속보 등의 자료를 네모
반듯이 접어 얇은 비닐포장을 한 후에 과자박스를 열고 자료와 과자를 번갈아 켜켜이 시루떡마냥 포개어 예쁘게 포장을 했다. 때로 과자 대신
케이크나 떡을 쓰기도 했다.
윤수경은 80년 5월21일 밤에 구사일생으로 광주를 탈출해온 한 사람으로부터 그때까지 언론이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던
광주사태의 실상을 전해듣고 내심으로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참말이라기엔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거짓말이라기엔 도무지 그런 말을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이경배가 와서 “이 분을 광주로 데려가라”고 했다.
생면부지의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잔혹한 진압으로 폐허가 된 광주 금남로로 갔다. 헐리기 이전의 광주 YWCA 건물
벽은 벌집 같은 총탄구멍이 선명했고 미처 다 지우지 못한 핏자국은 검은 기름처럼 바닥을 시꺼멓게 덧칠하고 있었다. 몽유병자처럼 한동안 거리를
해메다가 택시를 탔더니 운전사는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에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한 의사를 찾아갔다. 그 역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윤수경은 광주에 온 목적과 함께 그 의사의 형과 자신의 남편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생활을 같이하고 있음을 말하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긴 설득 끝에 의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피가 뒤엉겨 굳어 있는, 계엄군이 사용한 끔찍한 진압봉을 보여주었다. 많은 병원에서 피가
모자라 넘쳐나는 부상자를 다 치료하지 못했다는 증언도 들려주었다. 윤수경은 그 증언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남대 교수 명노근의 부인
안성례로부터 여러 장의 현장 사진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휴대한 채 네덜란드인은 김포를 빠져나갔다. 다음달 ‘세카이’를 본 한국
지식인들은 경악했다.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유언비어 취급을 당하기 일쑤인 ‘통신’을 연재하는 데 대한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의 열정과 집념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통신’을 도와준 세력 중 한국 정보기관이 모르고 있었던 해외 조직도 있다. 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계기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 목회자들이 WCC 본부가 소재한 제네바에 모이게 되었다.
캐나다의 한국 신학계 원로인 김재준과 이상철, 미국의 이승만·김인식·함성국·구춘회, 독일의 장성환·이삼열, 스위스의 박상증, 스웨덴의 신필균,
영국의 김준영 등이었다. 일본 내 진영은 더 강력했다. 재일교포의 지위와 인권향상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인하와 세계기독교학생운동위원회 아시아지역
간사 강문규, 아시아교회협의회 간사 오재식 등이 이미 국내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75년 11월 제네바 근교에서 비밀리에 기독자민주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표에 김재준, 총무에 박상증을 선출한다. 목표는
한국민주화운동의 지원에 있었다. 기독자민주동지회는 일본 내 활동가들의 주선으로 ‘통신’을 집필하고 있던 지명관에게 생활비를 대주기로 결정했다.
지명관은 86년 도쿄여대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일거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지명관은 이 덕에 ‘통신’ 집필에 전념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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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T·K生’이란 필명이 무슨 뜻입니까. 얼굴없는 칼럼을 통해 1970년대 민주화를 향한 한국인들의 외침을 세계에 알린
지명관(79)은 이같은 잦은 질문에 대해 “아무 뜻도 없이 당시 세카이 편집장이 그렇게 붙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민주화의 암흑기였던 당시에 일본에 머물던 그는 87년 ‘6·29선언’으로 한국에 민주주의가 싹트고 있다고 판단, 그 이듬해에 귀국했다.
그뒤 도쿄여대·한림대 교수,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KBS 이사장,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한림대 석좌교수로서 안양의 일본학연구소에서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7월29일에는 “내가 당시 세카이의 필자였다”고 공개해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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