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아라”

 


1974년 3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음악공연이 열렸다. 서울대 음대 교수 이종구의 작곡발표회. 대부분의 청중은 당연히 그렇게 알고 공연장을 찾았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자 무대에서는 전혀 엉뚱한 공연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춤을 추며 등장한 무용수들의 복장이 이상했다. 여공들의 옷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또한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벗으라면 벗겠어요/당신이 벗으라시면/창피해도 벗겠어요/쪽팔려도 벗겠어요/먼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고/도의적 법적 책임 없다 하여도/짜릿하던 그 순간/수지맞던 그 시절/꿈이었다 생각해도/벗으라면 벗겠어요/주체적으로 벗겠어요”


청중들은 경악했다. 60년대 초 대일 굴욕외교 이후 밀려드는 일본 자본에 의해 새로운 경제적 침탈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풍자한 그 음악무용극 ‘소리굿 아구’는 남사당 덧뵈기 중의 먹중마당, 즉 전통탈춤의 노장(老長) 과장(科場·마당)을 기본 골격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이후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는다’는 새로운 민족문화운동의 주물틀이 되었다. 시인 김지하를 필두로 임진택·채희완·김민기 등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텔리 딴따라’들이 그 운동의 아방가르드를 자처했다.


때는 바야흐로 저 서슬푸른 유신의 한복판이었다. 통금 사이렌에 장발 단속, 월남에서 돌아오는 유골함, 강제징집, 교내에 상주하는 기관원들, 언제나 검은 선글라스에 군복 입은 모습만 떠오르는 대통령…. 도대체 머릿속에 무엇인가 생각을 넣어 가지고 살다가는 질식할 것 같은 시대였지만, 청년들은 그래도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68년 프랑스 학생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히피와 만나고, 때마침 벌어지고 있던 추악한 베트남전쟁에 대한 전세계적 반전운동과 결합한 서구의 반문화(反文化)를 한국식으로 번안한 문화가 유행했다. 소설가 최인호가 맨 앞장을 섰고, 이장호의 영화가 그것의 대중적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72년)과 이장호가 만든 같은 이름의 영화(74년)는 당대의 흥행기록들을 경신했다. 양희은·송창식·한대수를 거쳐 대학가요제의 막후 스타로 떠오른 그룹사운드 산울림도 주류문화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서구적 반문화의 철학은 결국 도피였다.


“모든 나뭇잎이 그 흔들림이/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이 시월/ 무사무사(無事無事)의 이 침묵/아침, 거품 물고 도망가는 옆집 개소리/하늘을 보면 무슨 부호처럼/떠나는 새들//자 떠나자/‘무서운 복수(複數)’로 떼지어 말없이/이 지상의 모든 습지/모든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황동규, ‘철새’ 중에서)


유신체제에 맞서서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불씨를 새롭게 지펴내야 할 의무를 자각한 청년들은 눈을 돌려 오히려 과거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탈춤을 비롯하여 판소리, 풍물, 굿, 남사당 연희, 민요 등 전통적인 문화는 낡은 것이 아니라, 폭압의 세상을 뒤엎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주체인 민중의 문화요 무기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적’과 ‘황톳길’의 시인 김지하는 원주에 근거지를 두고 가톨릭을 중심으로 그 새로운 문화운동의 ‘뇌수’가 되었다. 그는 농어민과 노동자, 영세민을 계몽하는 데 초점을 맞춘 한편의 드라마를 직접 집필한다. ‘진오귀굿’(73년)이 그것으로, 김지하 미학의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악귀를 물리치는 ‘오구’ 또는 ‘오구굿’이라는 전통 농민굿에서 형식을 따와, 그것을 농촌의 민주화와 협동화를 가로막는 여러 장애물들과 벌이는 한판 투쟁으로 극화했다. 탈춤 형태였으므로, 당연히 무대가 아니라 마당에서 공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고전적 연극 무대를 버리고 브레히트의 반원형 무대마저 뛰어넘어, 문자 그대로 “살아 생동하는 원(圓), ‘마당’ ‘판’에서 이뤄지는 ‘굿’ 또는 ‘극’이 시작된 것”(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제2권)이었다.


이제 이 새로운 문화운동은 탈춤반이나 연극반 출신의 임진택·채희완·문무병·홍세화 등과 가수 겸 작곡가인 김민기를 거쳐 학교와 교회, 그리고 공장과 농촌 현장으로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는 탈춤반이라든지 전통문화연구회가 속속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자체의 역동성 때문에 수동적이고 현실도피적이던 기존 청년문화의 양태마저 바꾸어버렸다. 그 좋은 실례가 대학 축제였다. 축제 때면 어느새 탈춤공연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축제에 참가한 학생들은 넓은 마당에서 걸쭉한 입담과 과장된 동작으로 전개되는 한판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해방의 기분을 맛보았고, 관객의 처지를 넘어서서 함께 공연을 만들어간다는 주체의식까지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공연의 뒤풀이는 반독재 시위로 이어지곤 했다. 75년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할복자살 사건 이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상황에서도 5월22일 서울대에서 터진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 이른바 ‘오둘둘사건’ 당시에도 풍물은 중요한 동원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어쨌든 새로운 형태의 민족극(굿) 운동은 당대 현실이 요구하는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는 데 더없이 훌륭한 양식이었다. 민족문제를 소재로 한 ‘소리굿 아구’, 농촌문제를 다룬 ‘진오귀굿’과 ‘함평 고구마’, 근로자 및 도시빈민 문제를 다룬 ‘공장의 불빛’ ‘돼지꿈’, 사회문제를 다룬 ‘진동아굿’,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한 ‘장산곶매’ 등이 대표적 작품들이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탈춤을 기본양식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장르가 개발되기도 했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78년)이 좋은 사례였다. 김민기는 공장에 들어가 있을 때 여공들의 정서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숙사 방에는 적어도 한개씩은 카세트 녹음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잘 맞는 매체가 카세트 테이프라 판단하여,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특히 원본이 들어 있는 앞면과는 달리, 뒷면에는 반주만 넣어 여공들이 직접 흥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게 배려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가라오케였던 셈이다. 일단 만들어놓고 나니까 김민기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거 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골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그러다가 서울 제일교회에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하지만 경찰이 이미 쫙 깔려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김민기가 자신의 공연을 처음으로 본 건 박정희가 살해당한 후인 79년 연말 광주 들불야학에서였다.


‘광대’ 임진택의 경력은 곧 민중문화운동의 초기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72년 연극 ‘금관의 예수’(김지하 작, 최종률 연출) 출연, 연극 ‘무너지는 산’(박태순 원작) 각색 및 연출, 73년 ‘진오귀굿’(김지하 작) 출연 및 연출, 74년 ‘소리굿 아구’(김지하·김민기 작, 이종구 작곡) 출연, 76년 음악극 ‘가객’(황석영 원작, 김영동 작곡) 연출 및 출연, 77년 마당극 ‘유랑극단’(이근삼 작) 연출, 78년 마당극 ‘마스게임’(윤대성 작) 연출, 마당극 ‘돼지꿈’(황석영 원작) 각색 및 연출, 79년 마당극 ‘노비문서’(윤대성 작) 연출 등. 임진택은 김지하가 ‘두목’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 1세대에 이어 새로운 딴따라들이 줄줄이 전선으로 나왔다. 장만철(장선우)·김정환·황선진·김봉준·박인배·유인열·연성수·김명곤·유인택 등이 2세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선배들의 작업을 현장에서 소화해내는 한편, 그것의 미학적 체계를 이론화하는 작업에도 나름대로 힘을 기울였다. 정희섭·문병욱·강영희·심규호 등 3세대는 유신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더더욱 열악해진 분위기에서 운동의 맥을 이어가야 했다. 훗날 정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딴따라 운동, 새로운 민족문화운동은 장르에 상관없이 네 가지 새로운 미학이념, 즉 상황적 진실성·집단적 신명성·민중적 전형성·현장적 운동성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었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이 새로운 미학에 많은 것을 기대게 된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1월 09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