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밀항→망명→귀환 ‘살아남의 자의 슬픔’

 


1993년 5월19일 미국 LA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 윤한봉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79년의 부마항쟁에서 받은 충격, 이어 저 끔찍했던 광주 대학살, 1년여의 도피생활, 35일간의 밀항, 12년간의 미국 망명생활….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79년 10월의 부마항쟁은 윤한봉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그 정도로까지 폭발적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부산·마산을 방문해 무엇이 부마항쟁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직접 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79년 10월 중순 전남대 여학생들이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던 본관 건물의 학생지도상담실에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의 배후로 몰려 경찰에 연행된 것이다. 윤한봉은 74년 농대 축산과 4학년으로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돼 제적된 후 재야·청년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석방된 것은 12월9일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나서였다.


석방되고 얼마 안 있어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유신 잔당은 박정희 하나 죽었다고 무너질 세력이 아니었다. 일체의 환상을 버리고 의연히 대처하자고 다짐한 그는 부산으로 갔다. 부슬비 속에 시청 주변과 시장, 역전 등지를 다니며 부산지역 운동가도 만나보고 시민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민중은 관념적·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압제와 수탈 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면서 조용히, 그리고 남모르게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키워가는 평범한 생활 속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도부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항쟁은 저들의 강력한 물리력 앞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절감했다.


부산에서 돌아온 윤한봉은 광주·전남을 헤집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이 지역 민중들 속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변화에 대한 강렬한 갈망,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분명 군사정권을 수립하려고 할 것이다. 한편 대중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 충돌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운동권은 역량이 취약하고 조직도 허술해 대중을 지도할 수 없다. 조직되지 않은 대중, 지도되지 않은 대중과 엄청난 정보력·물리력을 갖춘 군부가 충돌할 경우 대중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광주에 엄청난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큰일이다. 대책을 세우자.’


80년 봄이 되면서 제적생들의 복학이 허용되었으나 윤한봉은 복학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광주가 피바다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누누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5월14일부터 학생들이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면서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제 누구의 눈에도 군부와 학생의 충돌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5일 선배의 아기 돌잔치에 초대받아 갔을 때 윤한봉은 또 피바다 이야기를 했다. “전두환 일당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나는 그 시기를 21일에서 25일 사이로 본다. 항쟁은 막을 수 없다. 피해는 줄이되 최대한의 정치적 성과는 남겨야 한다.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하자.”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8명이 있었는데, 훗날 그들 중 6명이 항쟁지도부에 합류했다. 윤상원(항쟁지도부 대변인), 박용준(시민군), 김영철(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정상용(항쟁지도부 외무위원장), 윤강옥(항쟁지도부 기획위원), 이양현(항쟁지도부 기획위원)이 그들이다.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17일 밤 윤한봉은 시인 문병란 집에 있었다. 11시 무렵 TV 자막을 통해 그 소식을 처음 접하는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곧이어 여기 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누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들이었다. 18일 새벽 문병란 집을 나와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봤으나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고 19일 아침 나주에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으나 대전역에서 검문검색이 살벌한 것을 보고는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답답한 마음에 여동생 집으로 갔더니 여동생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 광주를 떠나라”고 기를 쓰며 들볶았다. 윤한봉은 결국 21일 광주를 빠져나왔다. 나주에서 서성거리며 생각해보니 그 자신이 부끄럽기 한이 없었다. “잘못했다. 다시 광주로 돌아가 싸우다 죽자”고 결심하고 버스 정류소로 가는데 광주에서 차량을 타고 내려온 시민들이 나주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태는 이제 무장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윤한봉은 끝내 광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저들이 이미 광주 외곽을 철통같이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27일 도청이 함락되어 광주항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절망감, 무력감, 죄책감 속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마침내 순천에서 기차를 타고 은신처를 찾아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윤한봉은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전국에 지명수배된 상태였다.


서울에서의 도피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가을이 되어 군사재판이 열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윤한봉은 잡히면 반드시 죽는다.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군검찰관들이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윤한봉은 망명을 결심했다. 문제는 저들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어떻게 이 땅을 빠져나가느냐였다. 그런데 천우신조랄까 탈출의 길이 갑자기 열렸다. 경남 거창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정찬용에게 외항선에서 2등 기관사로 일하는 정찬대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윤한봉의 밀항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같은 배에 3등 항해사로 일하는 최동현도 고향(보성) 선배로 그가 가세하면서 밀항 계획은 급진전했다.


81년 4월29일 밤 9시 윤한봉은 정찬대·최동현과 함께 3만5천t급 무역선 표범호에 승선하는 데 성공했다. 윤한봉이 숨어 있는 공간은 표범호의 병실에 딸린 1평 반 정도의 환자용 화장실이었다. 이 병실은 원래 무역선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항선원들은 아플 경우 그냥 자기 방에 누워 있기 때문에 이 병실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윤한봉은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그 속에서 35일을 생활했다. 그가 35일간의 밀항기간 중 식사라고 한 것은 그들이 남몰래 밥이나 라면에 김치를 섞어 비닐 봉지에 담아온 것 여덟 차례뿐이었다. 나머지는 승선할 때 비상 식량으로 쓰려고 비닐 봉지에 담아온 두 주먹 정도의 잣, 마른 멸치, 마른 새우와 항해 12일째 정찬대와 최동현이 호주 상륙시 가져온 1일 두 숟갈 정도의 꿀뿐이었다.


굶주림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더위였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데다 사방이 철판이고 게다가 철판 벽 옆으로 연통이 나 있어 열기를 뿜어댔다. 특히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의 2~3일간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정신력 하나로 버티었다. 마침내 6월3일 윤한봉은 미국 워싱턴주 밸링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한봉이 이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덧 비행기는 서울에 도착했다. 21일 아침 윤한봉은 망월동으로 가 5월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죽지 못하고 도망간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연이어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나 그때마다 그의 인사말은 한결같았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아가겠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열심히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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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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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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