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과 침묵깨고 ‘자유언론’ 횃불들다
1975년 동아·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운동이 대량해직으로 막을 내린 이후, 유신정권의 극렬한 언론감시와 언론사주의
이윤추구라는 상업주의적 경영전략 속에서 ‘편집권 독립’은 설 자리를 잃었고 언론은 점차 총칼 아래 순치되어갔다. 암흑 속의 굴종과 침묵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언론사들은 권력이 주는 꿀물과 당근에 취한 채 무럭무럭 성장해 사세를 눈부시게 확장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수시로 보도지침이 하달되는 참혹한 언론현장을 부끄러워하면서 철권통치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지켜보는 젊은 기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78년 3월 중앙매스컴(중앙일보·동양방송)이 성남 주민교회에서 열린 ‘구속자석방 기도회’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성남 주재기자 박원훈을 해직시켰다. 관련기자들에게도 불이익 조치가 내려졌다. 이 사건이 젊은 기자들의 양심에 불을 지폈던지 6월7일
중앙매스컴 기자들은 ‘삼성그룹으로부터의 편집 및 제작의 자유 확보’ 등 7개 요구사항을 담은 결의문을 발표하고 동료 기자 및 직원 400여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고민하던 경영진은 기자참여율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를 대폭 수렴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조기에 수습했다.
곧이어 10월에는 동아투위의 ‘민권일지 사건’이 터졌다. 민권일지란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들을 일지화해
묶어놓은 것이었다. 동아투위는 민권일지와 함께 발표한 선언문 ‘민주민족언론의 좌표’를 통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들, 즉 일련의 대학생
데모사건, 동일방직 노조사건, 수많은 양심범의 투옥 등을 제도언론이 보도하지 않고 묵살해버리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이며 민중에 대한
배반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흐름은 79년 들어서면서 주로 젊은 기자들에 의해 계속된다. 경향신문 일선기자들이 극도의 정권편향적인 보도를 문제삼아
편집국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것을 시초로 비슷한 사태가 신아일보·중앙일보·동양통신 등으로 확산됐다. 각사별로 편집권 독립 등을
위해 삼삼오오 모여 고민하던 기자들은 5·30 신민당 전당대회, YH노조 강제해산, 부마항쟁 등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개별 언론사의 차원을 뛰어넘어 강고한 연대틀을 구축하는 데 동의한다.
경향신문·중앙일보를 선두로 한국일보·합동통신 기자들이 개별적인 접촉을 시작할 즈음 마침내 10·26이 터졌다. 독재자의 갑작스런
몰락은 그간 조용하게 움직이던 기자들에게 아연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우선 그동안 무기력했던 기자협회를 정상화시키는 게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는 데 합의했다. 우선 각사별로 기자협회 분회를 구성하는 데 착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70년대 언론자유운동의 산 증거인
동아·조선일보 해직자들을 복직시키는 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의 노력은 해직교수와 해직기자들의 복직문제를 전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언론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학원, 종교계 등 지식인사회 전반으로부터 해직기자 복직을 요구하는 응권군을 만들어낸다.
옥중에서 발병한 지병 때문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동아투위 위원장 안종필이 80년 2월29일 운명한 뒤 거행된 장례식에는 무려
1,0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모였다. 이를 계기로 기자협회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히 진행됐다.
3월31일 기자협회장 선거에서 합동통신 기자 김태홍(열린우리당 의원)이 젊은 대의원들의 지지로 단일후보로 나와 협회장에 당선됐다.
4월1일 출범한 제20대 기협은 부회장단으로 정교용(중앙), 노향기(한국), 고영재(경향), 이홍기(한국방송), 이수언(부산일보) 등의 진용을
갖추고 ‘기자협회의 밤’을 열어 회원간 결속을 다지는 한편 개정 헌법의 언론조항 시안을 만드는 등 법과 제도 정비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한편 기자협회장 선거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중앙일보 기자들은 ‘탁경명 사건’을 계기로 ‘민중과 함께 가는 언론의 길’을 천명하고
나선다. 중앙일보 기자 탁경명은 사북사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으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기협은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기협 중앙일보 분회는 폭행사실을 지면에 반영하려고 애썼지만 계엄사와 맞서다가 애석하게도 1단으로 간단히 보도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79년 12월에 편집권 독립 주장과 관련해 편집국 밖으로 인사조치당했던 박우정·고영재·표완수 등 세 기자를 복직시킨 개가를
올린 경향신문 기자들은 기협 분회를 결성한 뒤 사내 대자보를 통해 용감하게 검열철폐를 요구하고 나섰다.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공백으로 제작하기로
결의함과 동시에 편집국 입구에 ‘기관원 출입금지’라는 표지를 붙이고 기관원의 상시출입을 막고 나섰다. 이후
한국일보·동양통신·문화방송·한국방송·기독교방송·국제신문·현대경제일보 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동아에서는 동아방송이 중심이 됐다.
이러한 흐름이 상승세에 있던 중 5·17이 급습했다. 안개정국에서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던 대대적 검거 회오리가 몰아치면서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기협 회장 김태홍과 부회장 노향기가 도피하고 부회장단과 편집실장 김동선 등이 당국에 연행되는 등 언론계에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이런 속에서도 5월19일 이후 경향신문·중앙일보·합동통신·한국일보·문화방송·조선일보·현대경제일보·동아일보·동아방송
기자 등은 ‘광주사태에 대한 왜곡보도’에 분노하며 제작거부운동에 들어갔다. 국민들은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신문사 편집국에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속보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군화발을 막을 힘이 사회 전체는 물론 언론인 사회에도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광주항쟁을 사실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데
대한 항의로 시작된 제작거부운동 역시 거의 모든 신문사에서 참여했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보복은 거침없고 잔인했다. 그들은
전격적으로 언론사의 통·폐합에 착수, 중앙종합일간지 1개, 경제지 2개, 지방지 4개, 통신사 4개, 중앙종합방송사 2개 등을 없애버렸다.
사주들은 보안사의 밀실에 끌려가 협박당했으며 제작거부에 참여한 700여명이 거리로 내몰렸다.
4년 후 이들은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를 결성해 “모든 분야의 민주화 조속 실현을 위한 언론자유 보장과 해직기자 원상회복”을
요구한다. 그 무렵 전두환은 저항세력을 완전 진압했다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에다 살인마 정권이라는 국제적 오명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제적학생과 해직교수들을 대부분 원상회복시켰으나 해직언론인들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신군부에는 학생
데모나 교수 등 지식인들의 반대운동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언론인들의 사실보도와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23년이 지난 오늘, 만개한 언론자유 속에서도 편집권 독립은 여전히 양심적인 기자들의 화두이다. 총칼이 있던 권좌에 이제는
거대자본이 똬리를 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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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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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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