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적 언론·문화탄압 ‘한국판 문서갱유’
1980년 5월17일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는 곧바로 민주세력 검거와 구속 등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을 강행하는 한편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잠재적 위협세력에 대한 제거작업도 병행했다. 2급 이상 공무원 232명에 대한 숙정과 정기간행물 무더기 폐간, 삼청교육
강행 등이 그것이다. 특히 정기간행물 등록을 무더기로 취소한 것은 같은 해 11월의 이른바 언론기관 통·폐합과 더불어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파시즘적 언론·문화 탄압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80년 7월31일 문화공보부는 사회정화를 위해 주간·월간·계간지 등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했다. 유가지 120종(전체
유가지의 26.3%), 무가지 52종(전체 무가지의 5.3%)이 등록취소됐다. 이는 일간지나 통신 등을 제외한 총 정기간행물의 12%, 전체
유가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경천동지할 조치였다.
등록 취소 사유는 ▲비위·부정·부조리 등 각종 사회적 부패 요인 제공 ▲음란·저속·외설적 내용으로 청소년 정서에 유해한 내용 게재
▲계급의식 격화 조장, 사회불안 조성 등의 책임이다. 지방잡지나 전문업계 잡지 등이 아마도 첫째 사유에, ‘주간국제’ ‘주간부산’ 등 주간지와
‘명랑’ ‘아리랑’ ‘사랑’ 등 월간지들이 둘째 사유에, ‘씨알의소리’ ‘창작과비평’ ‘기자협회보’ 그리고 각종 대학언론들이 셋째 사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 정권들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부패와 음란한 대중문화를 사회문화적 토대로 삼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정권이 사회기강
확립을 내세우며 부패와 음란에 칼을 들이댄 것은 ‘껄끄러운’ 일부 잡지들을 탄압하기 위해 부패·음란물을 들러리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군부가 껄끄러워한 잡지로는 ‘월간중앙’ ‘씨알의소리’ ‘현존’ ‘뿌리깊은나무’ ‘기자협회보’, 계간지로 ‘저널리즘’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이다.
‘월간중앙’은 신군부의 비위를 건드릴 만한 특정 기사를 문제삼은 것으로 보이며, ‘기자협회보’와 ‘저널리즘’은 둘 다 한국기자협회의
기관지로 신군부 동향에 비판적인 논조와 집단적 동향이 문제가 됐을 터이다. 이들은 이른바 ‘사회불안 조성’에 해당하는 간행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전통적인 반체제 잡지였던 함석헌의 ‘씨알의소리’와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간행한 기독교 잡지 ‘현존’,
한국 민중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잡지의 큰 줄기로 잡아왔던 ‘뿌리깊은나무’, 그리고 입장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70년대 한국문학과 지성의
비판적 전통의 두 줄기를 이룬 계간지 ‘창작과비평’(이하 ‘창비’)과 ‘문학과지성’(이하 ‘문지’) 등이다. 신군부가 ‘계급의식 격화
조장’이라는 사유를 내세운 것은 바로 이 잡지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이는 신군부 문화정책 담당자들의 안목이 결코 가소로운 수준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60년의 4·19를 기점으로 분단시대 초기의 단세포적인 냉전논리와 반민주주의의 야만적 폭력에서 벗어난 한국문화는 근대적 주체로서
민족을 재발견하고 그 제3세계적 정체성을 수용하는 한편, 70년대 유신시대를 통과하면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분단을 극복해 자주적 민족민주국가를
건설할 중심주체로서 ‘민중’을 발견했다. 이 민중은 유신의 폭압 아래서도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섰던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동시에 이미 수많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을 통해 자기 존재의 탄생을 알려온 미래 한국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군부가 ‘계급의식을 격화 조장한다’고 문제삼은 잡지들은 바로 이러한 민중의 등장을 예고한 예언자이고 증언자였다.
‘과격한 퀘이커교도’ 함석헌의 ‘씨알’이 곧 민중이고 ‘씨알의소리’가 곧 민중의 소리임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병무·서남동·문동환 등이 활약한 종교잡지 ‘현존’은 해방신학과 함께 제3세계 진보신학의 두 축을 이루고 있던 민중신학의 수준 높은 이론지였다.
월간지로는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실천한 ‘뿌리깊은나무’는 한국인의 주체적 문화의식을 일깨우는, 소박하지만 민족주의와 민중의식으로 가득한 기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비’야말로 신군부 탄압 대상 0순위였다. 66년 창간된 이래 문학적으로는 민족민중문학, 정치적으로는 분단극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은·신경림·김지하·이성부·조태일·김남주·황석영·이문구·방영웅 등 민족민중문학의 대표 주자들이 지면을 빛냈고,
리영희·강만길·박현채·백낙청 등 민중과 민족을 이론의 중심에 두었던 이론적 맹장들이 포효했다. 70년대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한 지식인과 대학생,
민중운동가들의 필독서 목록 1호였다.
잡지학살에서 가장 눈길을 끈것은 ‘문지’ 폐간이었다. ‘문지’는 4·19세대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낸 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
등 네 사람의 동인지 형식으로 70년에 창간된 계간지로 ‘창비’와 서로 훌륭한 생산적 타자로서 70년대 비판담론을 생산하고 견인해왔다. 체제나
정권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이나 저항을 담은 글을 게재했던 적은 없었지만 신군부정권은 이 온건한 지식인 잡지까지도 체제위협 요소로 파악한
것이다.
김병익의 증언에 의하면 폐간 1년 뒤 우연히 보게 된 정부백서라는 데서 ‘문지’가 “일부 불온한 지식인 집단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는
잡지”라는 이유로 폐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김병익, ‘글 뒤에 숨은 글’, 문학동네, 2004). 신군부가 보기에는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체제와 대항한 ‘창비’나 우회적이고 이론적인 방식이지만 근본적으로 체제와의 불화를 전제로 해 온 ‘문지’나 불온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의 ‘분서(焚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출판사 등록 취소라는 위협까지 극복하면서 ‘창비’는 결국 복간돼 여전히 한국
민족주의의 아성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문지’는 ‘문학과사회’로 재창간되는 형태로 되살아났다. 잡지를 폐간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은 ‘일부 불온한 지식인 집단’까지 전부 ‘갱유(坑儒)’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폐간조치는 한국 현대문화사 전체를 두고 보면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창비’와 ‘문지’로 상징되는 비판적 지식인 중심의 70년대식 지적 풍토로는 80년대 지배집단과의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엔 미흡하다는
통찰을 얻고 있었다. ‘창비’와 ‘문지’가 폐간된 이후 보다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불온한’ 각종
매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은 ‘변혁의 80년대’를 열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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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저항의 ‘창비’ 판금·폐간 수난시대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1966년 1월 당시 28세의 영문학자 백낙청은 ‘창작과비평’ 창간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후 ‘창비’의 창조와 저항 정신은
30여년간 한국의 지성과 양심을 대변해 왔다. 초창기 이문구의 ‘관촌수필’, 황석영의 ‘객지’ ‘한씨연대기’, 방영웅의 ‘분례기’는 ‘창비’의
대중적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강만길·리영희·박현채 등 쟁쟁한 학자들의 기고는 민족적 관점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했다.
‘창비’는 판금과 폐간 등의 수난에도 맞섰다. 75년 봄호는 긴급조치가 선포된 후 회수됐고 리영희의 ‘베트남전쟁3’이 게재된
여름호는 판금됐다. 80년 강제 폐간되고 8년만에 복간될 때까지 무크 형태 발행, 출판사 등록 취소 등 어려움도 겪었다. ‘창비’는 98년
여름호로 계간지 사상 처음으로 지령 100호를 돌파했고, 여전히 민족문학과 비판적 담론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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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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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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