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야기 8]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다
[제2회 월드컵] 파시스트의 독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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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 월드컵에 관심을 갖다

제2회 월드컵(1934년) 개최를 희망한 나라는 13개국에 달했다. 그 가운데 스웨덴과 이탈리아가 마지막까지 경쟁했는데 이탈리아가 최종적으로 개최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던 세계 대공황은 각국의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하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스트당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으며 적자를 각오하고 대회 개최를 희망한 이탈리아가 최종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독재자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치경쟁에 뛰어들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월드컵 유치가 자국의 파시즘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것이다. FIFA 역시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고민했지만 창설 30주년 대회가 연기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이탈리아의 축구 열기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스포츠의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무솔리니의 심복으로 축구협회 회장에 앉게 된 바카로 장군은 대회의 목적을 “파시스트 스포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대회 포스터는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파시스트식 경례를 디자인했으며, 경기가 치러지는 각 스타디움을 파시스트당 선전 도구로 삼았다. 당시의 경기는 라디오를 통해서 중계되었는데, 이 중계를 통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전 세계에 홍보되기도 했다.

예선 거쳐 16개국 참가

제2회 월드컵에는 FIFA 가맹국 47개국 중 32개국(유럽 21개국, 북남미 8개국, 이집트, 터키, 팔레스티나)이 참가를 신청했다. 당시에 아시아에서 FIFA에 가맹되어 있던 나라로 일본,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샴(현 타이), 필리핀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예선 없이 곧바로 본선을 치른 제1회 대회와는 달리 제2회 대회부터는 예선을 거쳐 본선 진출국을 결정하였다.

오늘날 자동진출권을 가지는 개최국도 당시에는 예선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4-0으로 이기고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각각 페루와 칠레의 기권으로 자동 출전했다.

미국, 쿠바, 멕시코, 아이티가 하나의 출전권을 놓고 벌인 지역예선에서는 미국을 제외한 3개국이 싸워 그 승자가 미국과 대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1차 예선에서 쿠바가 아이티를 2승 1무로 이기고 2차 예선에 올랐지만 멕시코에 3패로 탈락하고 멕시코와 미국의 승자가 본선 진출권을 놓고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미국이 멕시코를 4-2로 이기고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는데 그 경기는 대회 개막 6일 전 로마에서 치러졌다.

아프리카의 이집트는 터키와 팔레스타인과 한 조가 되어 지역예선을 치렀다. 터키가 기권하고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을 7-1, 4-1로 연파하고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남미의 비협조적 태도

제1회 대회가 유럽의 비협조적 태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남미의 국가들은 제2회 월드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2회 월드컵에는 전 대회 챔피언인 우루과이가 불참을 선언했다. 우루과이가 불참하게 된 원인으로는 4년 전 월드컵에서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한 일종의 항의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와, 파시즘에 오염된 대회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대회 직전에 칠레나 브라질에 연패하면서 주력 선수의 노령화로 팀 수준이 저하된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제2회 월드컵은 유일하게 전 대회 챔피언이 참가하지 않은 경기가 되었다.

비록 지역예선은 통과했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정예 선수를 이탈리아로 보내지 않았다. 당시에 우승에 목이 마른 이탈리아는 획기적인 선수 기용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우승을 위해서 타국의 선수들을 이탈리아로 귀화시켜 자국의 대표로 뛰게 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의 올시와 구와이타와 몬티를 그들의 선조가 이탈리아인이었다는 이유로 귀화시켜 자국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당시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에서 남미로 이민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남미의 경제사정 때문에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귀화하는 축구 선수는 그 이후에도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에는 한 번이라도 대표로 국제 경기에 출전하면 그 후로는 국적을 바꾸어 다른 나라의 대표가 될 수 없지만, 당시에는 한 국가의 대표 선수였다가 국적을 바꾸어 다른 나라의 대표가 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토너먼트로 진행된 대회

제2회 월드컵은 제1회 대회와는 달리 8개 도시에서 경기가 열렸다. 또한 본선은 리그전을 벌이지 않고 16개국에 의한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본선에 오른 16개국은 유럽 12개국(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헝가리), 남미 2개국(아르헨티나, 브라질), 북중미 1개국(미국), 아프리카 1개국(이집트)으로 결정되었다.

본선에 오른 16개 팀이 우승하기 치러야 할 경기는 네 번이었고, 이 네 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아야 했다. 4년을 기다렸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한 경기만 치르고 고국으로 돌아갈 팀이 8개 팀이었다. 첫 경기부터 살아남기 위해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야 했고 승리의 여신은 어느 팀을 살릴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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