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조 목사님, 당신은 해서는 안될 말을 했습니다.
여성 인질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박은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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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 이후, 더욱 몸조심해야할 인질들

 

연합뉴스에 보도된 아프가니스탄 인질들에 대한 개종과 성폭행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의 근원은 샘물교회 담임목사 박은조 목사라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그가 석방된 인질들을 만난 직후에 언론과의 접촉에서 한 이야기라 더더욱 걱정이 앞섭니다.

 

박은조 목사가 언론에 알린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무수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피랍되었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고 샘물교회를 통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당사자들과 가족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잘못은 했지만 그들의 무사 귀환을 온 국민이 바랬습니다.

 

국민들의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졌고, 비록 두 사람의 희생은 있었지만 나머지 인질들이 무사히 고국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환한 인질들에 대한 시선이 그다지 고운 것은 아닙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따가운 시선도 많습니다.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 중에서 인질 상황을 바지 속에 적어와서 공개한 것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네티즌들의 소재거리가 되는 현실입니다.

 

석방과정에서는 온 국민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석방 이후에 그들을 대하는 마음은 각기 다릅니다.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삼가고 자제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여성 인질들의 성폭행 가능성을 언급한 박은조 목사

 

어찌보면 피랍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모면하기 힘든 당사자인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의 행동은 그러한 점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응시하는 네티즌들을 자극하는 결과밖에 안되었습니다. 피랍된 사람들이 용감하게 피랍 상황을 대처했고,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박은조 목사는 샘물교회 담임목사로서 피랍된 사람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감싸주고 돌보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입니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서 피랍된 사람들을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은 일을 하였습니다. 조그만 사실을 갖고도 엄청난 폭팔력을 가질 수 있는 언론을 향해서 무책임하게 내뱉은 행동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었습니다.

 

“개종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제창희, 송병우 씨 등은 심하게 구타를 당해 얼굴 등이 크게 붓는 등 온몸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흉기를 들이대며 살해위협도 수차례 가했다고 밝혔다”

 

“제창희, 송병우 씨는 일부 인질 여성들이 성폭행 위협에 놓였을 때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그들의 시도를 막았다"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살해된 것도 개종 강요와 폭력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

 

# 과연 성폭행 위협이 있었을까?

 

이슬람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탈레반이 인질을 향해서 성폭행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보다 조심스럽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아무리 탈레반이 테러 집단이라고 하지만 과거 한 나라를 담당했던 집단입니다. 이번 인질 사태 이후에 계속해서 미국과 긴장관계를 가져야 할 집단입니다. 만약 세계 여론이나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에게서 외면당한다면 아무리 무장을 강화해도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할 명분이나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할 머저리 집단은 아닙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성폭행을 하려고 시도했을까요? 물론 전체 탈레반 지도부는 그런 생각을 안했다고 하지만 억류기간 중에 몇몇 탈레반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시도가 있었고, 성폭행이 가해졌다면 19명이 한꺼번에 풀려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입막음을 위해서 몇 명은 더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동료의 성폭행 위협을 강력하게 저지했던 두 남자의 목숨은 더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가능성은 그들이 진정으로 성폭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단순히 위협적인 제스쳐를 취했을 가능성은 남아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폭행할 의사가 있었더라면 두 남자의 저항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할 정도로 탈레반이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보도된 기사의 조각을 맞추다보면, 박은조 목사의 말이 진실이라면 성폭행의 위협이 있었던 여성의 인질이 누구였는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언론의 보도에는 동료의 성폭행 위협에 저항한 제창희, 송병우 씨와 두 명의 여성 인질이 한 조가 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 박은조 목사의 발언은 경솔했다

 

박은조 목사의 발언의 목적이 피랍된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고, 기독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겠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당사자들인 피랍자들과 탈레반들만 아는 사실입니다. 무수한 루머와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어떠한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여성의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여성 인질들의 성폭행 위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위험성을 갖고 있는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티즌들이 한걸음 양보해서 남자들 두 사람이 있을 때는 성폭행 위협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남자들이 없을 때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남자들 두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면서 여성 인질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의 가능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과연 온당한 행동입니까?

 

오늘 피랍자 가족들은 여성 인질들의 성폭행 가능성을 언급한 미국의 ABC 외신에 대하여 명예회손 소송을 생각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랍자 가족들은 “여성인질들의 성폭행 위협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들이 강하게 저항해 저지시켰다”며 “이번 보도를 한 미국 ABC방송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여부를 고려하고 있다”고 대응을 천명했다고 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네티즌들이 성폭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외신의 보도보다는 박은조 목사의 언론과의 접촉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랍자 가족들은 외신 보도에 소송을 걸기 이전에 박은조 목사에 대한 입장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네티즌들이 우려하는 것 중 하나는 만에 하나 기독교가 이번 사태에 대하여 자신들이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행동이나 피랍자들을 영웅시하며 자신들의 선교에 이용하려는 행동입니다. 피랍자들이 이후에 순회 강연이나 기독교 행사에 초청을 받아서 자신들의 신앙 간증을 하는 것은 이번 사태를 지켜본 다른 종교인들에게 욕을 먹을 수 있는 행동이라고 강조된 바 있습니다.

 

박은조 목사는 적어도 여성 인질에게는 명쾌하지 않은 성폭행의 가능성을 그들의 인생 끝까지 짊어져야 할 멍에를 안겨주는 데 동참한 것입니다. 남성 인질 두 명은 위기의 순간에서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은 영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질 사태에서 약자인 여성들은 석방 이후에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과거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이후에 몽고 침략자들에게 순결을 잃은 여성들에 대하여 지켜주지 못한 남성들이 오히려 여성들을 ‘더럽고 순결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하며 사회적으로 멸시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여성들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박은조 목사 

 

오히려 박은조 목사는 성폭행 위협을 설교하고 다니지 말고, 탈레반이 인질 억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권유린의 행동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강조해야 하고 또한 그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박은조 목사의 행동은 전혀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짐승 같은 탈레반의 위협에 인질들이 당당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박은조 목사는 탈레반은 마치 적그리스도나 짐승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인질들은 적그리스도의 위협에 당당히 대처하는 올바른 신앙인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거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질이 억류되던 상황에서 탈레반이 이성적으로 인질들을 풀러주기를 호소했던 당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어차피 인질 사태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경험이 있는 국민들은 이번 인질 사건에 대해서 상식 수준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박은조 목사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1) 인질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을 지켰고, (2) 남성 인질들은 용감했지만, (3) 여성 인질들은 성폭행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버립니다. 믿고 안 믿고는 각 개인의 몫입니다.

 

탈레반이 인도주의적으로 그들의 과거 전통 지침에 따라서 여성 인질들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을 것을 강조해도 모자를 판에 탈레반은 짐승같은 집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여성 인질들에게 앞으로 얼마나 해가 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박은조 목사의 발언에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박은조 목사는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바를 언론에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피랍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순교와 희생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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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들의 피 값으로 세워진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렇게 편하게 교회에 다니며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만약 내가 그 당시의 시대를 살았다면 고문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일찌감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명령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를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하실 것 같습니다. 올바른 기독교인이 먼저 되어야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교라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수행한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선교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동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가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행동인 순교는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종교에서 죽음을 최고의 덕목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능한 절대자라면 구태여 피조물인 인간의 피를 원하실까?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일본의 기독교 신도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겠다며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여, 긴긴 세월 동안 나는 수없이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이 일본에 오고 나서는 더 한층 나는 그랬습니다. 도모기 마을에 있는 산에 숨어있을 때, 산속을 방황했을 때, 그리고 저 옥사에서 밤에 당신이 기도하시고 있는 얼굴을 기도드릴 때마다 생각하고, 당신이 축복하고 있는 얼굴을 고독할 때 생각해내고, 당신이 십자가를 짊어진 얼굴을 체포된 날에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그 얼굴은 나의 영혼에 깊게 새겨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어 나의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나는 이 발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에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겨진 것을 밟는 것이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서 울었다.
[엔도 슈사꾸, 침묵 中에서]


엔도는 등장 인물의 말을 빌어서 '만약 예수라면... 그도 배교했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순교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종교적인 용어가 사회, 정치적으로 무분별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순교란 기독교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의 덕목 중에 최고의 덕목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순교는 예수의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야말로 순교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해서 끝까지 굴하지 않는 용기와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어야 순교자로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고리타분하게 ‘순교’라는 용어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라는 용어는 너무 남발되고 있습니다. 전후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무조건 ‘순교’라는 용어를 적용해왔습니다.

종교나 예수를 위한 죽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로 부릅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용어의 사용이 오늘날 기독교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면서 그것이 바로 예언자적인 활동이고 순교자적인 행동이라고 감히 주장을 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학법 개정에 대하여 ‘순교의 정신’을 들먹입니다. 정부가 사학법 개정을 통해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확대 해석하면서 순교의 정신으로 끝까지 투쟁한다고 합니다.

이라크에서 저항세력에 의해서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경우도 순교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납치되어 살해되는 경우도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김선일 씨는 순교한 것이 아니라 무고하게 희생당한 것입니다. 순교와 희생은 엄밀히 구분해야 합니다. 비기독교인은 이러한 용어의 선택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분들에게도 ‘순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들이 납치되고 고통을 당하고 일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국제 정치관계에 의해서 무고하게 희생을 당한 것이지, 순교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용어를 정치적인 국제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만약 피랍된 사람들이 정정당당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를 목적으로 간 것이고,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이슬람 과격 단체를 향해서 끝까지 기독교를 전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죽었다면 그들은 순교한 것이 맞습니다.

순교할 각오를 하고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과, 순교는 다릅니다. 지금의 상황은 온 국민이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고, 샘물교회측도 그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그들 역시 지금의 상황 속에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이슬람을 떠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이 그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상상 이상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이 무사히 귀한할 수 있도록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인도주의적인 정신으로 그들이 무사하게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 아프가니스탄 사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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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협상 완전 실패’를 선언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납치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생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 되어버렸습니다.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의 지도층은 협상 실패를 선언하면서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는 외신이 속보로 보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오보성 기사와 소식을 많이 접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오보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보지만 상황은 점차 안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탈레반은 여성 인질을 죽이지 않는다는 그 동안의 관례에도 기대를 걸었고, 대통령의 특사까지 파견된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보았지만 직접적으로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탈레반의 행동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라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탈레반이 요구하는 죄수 석방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미국은 인질을 풀어주라는 이야기만 할 뿐 강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우방(?) 미국의 결단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미국은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우방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고, 중대한 결정의 상황에서는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미국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비굴할 정도로 미국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보수적인 집회에는 당연히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휘날렸습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고마운 나라였고, 그러한 미국을 배신한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사람들이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은 다 해야 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국민이 시시각각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해지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개신교는 무분별한 해외선교를 반성하면서도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기도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납치된 사람들의 무사귀환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인질들의 무사 석방과 귀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로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진정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번 인질 석방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여겨지는 미국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입장은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 그것도 테러집단과는 협상보다는 강경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인질을 풀어주기 전에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미국의 윤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인질을 풀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결국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탈레반이 협상 실패를 선언하는데 기여를 하였습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죄수 석방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결정이라고 하겠지만 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국의 허락 없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미국인이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만약 한명도 아닌 20명이 넘는 미국인 인질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되었다면, 미국은 일단 포로의 석방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손해보지 않고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테러집단의 잔학함을 홍보하는 기회를 얻었고,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의 명분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미국에 의해서 자행되는 수많은 지역분쟁은 해당 지역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약소국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 분쟁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폭력의 악순환에 의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지금, 아니 연말에 선택되는 대통령이 자주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을까요?

# 한국의 기독교, 선교할 자격이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가 통계상으로 천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나아가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한다. 건물 위로 우뚝 솟은 십자가는 밤이 되면 빨갛게 도시를 뒤덮어 버린다.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한 것을 놓고 해외의 기독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연구 대상으로까지 삼고 있다.

물론 한국의 기독교의 성장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가 수많은 교회와 신도 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하여 제대로 서 있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예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십자가보다 편안함을 바라고, 가끔씩은 대형집회를 통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행동은 무조건 사탄이라고 도매급으로 넘겨버리는 기독교의 모습을 예수님이 어떻게 보실까?

인도의 기독교인구가 2%라고 한다. 비율로 따지면 엄청나게 적은 숫자로 보이지만 실제로 따지면 10억 인구 중에서 2천만이 기독교인구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지역으로도 잘난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시시각각 들려오는 선교적 업적에 우쭐해하고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새롭게 선택받는 나라임을 자부한다.

동남아시아의 자연재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버젓이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특별 금식기도를 부르짖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형교회의 목사다.

교회는 국내에서 국가와 정부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국가와 정부를 향해서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다. 아니 적극적으로 사회가 올바른 모습을 갖도록 예언자적인 모습과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은 예언자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을 위한 투쟁, 아니 밥그릇을 더 갖기 위한 투쟁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내의 기독교가 해외로 선교사를 보내면서 선교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아프간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반드시 진단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요즘 가짜 학위와 학력 위조가 한국 사회의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격 없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학위나 학력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사회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해외 선교 측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전체 한국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을 위한 행동을 하는 기독교가 과연 해외 선교의 자격이 있을까? 물론 지금도 해외나 오지에서 남모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면서 순수한 목적으로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기독교의 해외 선교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배타적이고 위험하고 오히려 해외에서 기독교와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무엇이 선교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선교’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다는 아니지만 선교를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차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명령에 순종한다며 땅 끝으로 가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복음’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자만심일까?

상대편인 이슬람이 먼저 ‘칼이냐 코란이냐’를 주장했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 칼을 들어버린 서양교회의 십자군의 신앙적 전통을 받아들여서 땅 끝까지 기독교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외형적으로 기독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해외로 열정을 가지고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을 내보낸 성직자(교회)에게 있다. 그들에게 해외 선교의 열정을 갖게 한 것은 교회이고 성직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성직자들이 진정으로 선교의 의미를 알고 올바르게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시켰을까?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거짓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종시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 까지는 좋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해당 지역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이번 아프간 피랍 사건을 보면서 왜 이들이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봉사활동을 갔을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 단순히 해외의 위험한 지역에서 봉사(선교)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이런 위험한 지역에까지 나가서 선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아닌가?

선교는 자신들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선교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남모르게 행하는 자선 행위나 봉사 행위는 기독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 단체의 이름으로 자선과 봉사 행위를 기획하고 구상하며 실천하고 있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사람들이 물론 해당 선교지에서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을 후원하는 한국으로 돌아왔을 경우에는 해당 선교지에서의 활동 상황은 그대로 후원하는 교회의 업적으로 쌓이는 것이 상식이다.

# 이제는 해외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선교, 해외 선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 서양 열강이 앞을 다투어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선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선교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신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 교회가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최고이고, 오로지 정답이라는 개교회주의가 한국 교회를 버려놓은 것 같다. 정부가 교회의 해외 선교를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교회가 소속한 교단조차도 개교회의 선교 활동에 지침만을 제공할 뿐, 이래라 저래라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어느 정도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현재의 해외 선교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교단은 교단 나름대로 개교회의 해외 선교에 보다 현명한 방식들을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고,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기독교의 해외 활동이 도를 넘지 않도록 권면과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행위는 중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식민지 쟁탈전 방식의 선교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지인을 통한 선교로 방향이 전환되고 있다.

일단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피랍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무사 귀환이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현재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선교의 방법과 모습에 대해서 기독교 자체적으로 진단하고 검증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향후에 선교사들과 국가간의 협력에 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은 개인의 의지라고 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해당 지역이 위험하다고 정부에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현지행을 강행한 단체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고는 누가 치고 수습은 누가 하나’ 라는 비판도 있다. 물론 기독교는 그러한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던 교회는 국가가 교회를 향하여 의견을 제시할 경우에도 자신들의 행동을 국가에 의해서 간섭받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세력을 통해서 국가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가 해외에서의 활동에도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국가는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간섭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해외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파송받았고 교회에서 추진하는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국민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정부)와 협력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은 한국의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에 의해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물론 한국의 이미지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프간에서 피랍된 봉사대원들은 해당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한 정부 기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강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피랍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해당 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 국가가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차후에 이런 행동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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