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야기 38] 브라질, 대회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다.
[1962년 제7회 월드컵] 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를 누르고 우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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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과 체코슬로바키아, 조별리그 통과

브라질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멕시코, 그리고 스페인과 한 조가 되었다. 대회 전부터 브라질은 우승후보로 손꼽히고 있었다. 브라질과 한 조가 된 팀들 중에 멕시코는 약체로 평가되고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 팀이었다. 오히려 축구팬들의 관심사는 용병집단 스페인에게 쏠려있었다. 스페인은 1954년 마법의 팀을 이끌었던 푸스카스와 아르헨티나 출신인 디 스테파노, 파라과이 출신 마르티네스, 우루과이 출신 산타마리아 등이 포함된 그야말로 다국적 팀이었다.

브라질의 첫 상대는 약체인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그 동안 월드컵에서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팀이었다(1무 7패). 전반전 탐색을 마친 브라질은 후반전에 자갈로와 펠레가 한 골씩 넣으며 2-0으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었다.

브라질의 두 번째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이들과의 경기에서 펠레는 대회전에 다쳤던 대퇴부가 악화되어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였다. 선수교체가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였기에, 브라질은 실질적으로 10명이 싸운 꼴이 되었다. 이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브라질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결승 토너먼트 진출의 향방이 가려지게 되었다.

브라질의 마지막 상대인 스페인은 개개인의 기량은 뛰어났지만 팀워크에 문제가 있었다. 첫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0-1로 패하고, 두 번째 경기에서 약체 멕시코에게 고전하다가 경기 종료 직전에 페이로(Peiró)가 골을 넣으면서 간신히 승리하여 1승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경기를 치르면서 어느 정도 팀워크가 향상되었고, 마지막 브라질과의 경기를 잡는다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6월 6일에 열린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스페인이 먼저 한 골을 넣으며 전반전을 1-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만약 이 경기에서 스페인에게 패하고 다음날 체코슬로바키아가 멕시코를 이긴다면 브라질은 탈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브라질을 긴장시킬 무렵, 펠레 대신 출전한 아마릴도(Amarildo)가 후반전에 동점골(72분)과 역전골(86분)을 넣으며 팀을 구했다.

브라질이 승리하며 2승 1무가 되었고, 스페인은 1승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본선 진출을 확정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이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멕시코는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되어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3-1로 이기며 월드컵 본선 첫 승의 감격을 누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 브라질, 결승까지의 행진

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브라질이 준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축구종주국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는 축구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브라질은 펠레가 없이도 잉글랜드를 제압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가린샤(2골)와 바바(1골)가 활약한 브라질은 잉글랜드를 3-1로 제압하며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잉글랜드로서는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지고 탈락의 위기에 놓여있었으나 아르헨티나를 3-1로 격파하고 불가리아와 0-0으로 비기며 간신히 골득실에서 아르헨티나보다 앞서서 조 2위를 확보하고 준준결승에 올랐지만 브라질에게 패하며 쓸쓸히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브라질의 준결승 상대는 개최국의 이점을 충분히 받으며 준준결승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중의 하나인 소련을 2-1로 누르고 올라온 칠레였다. 칠레는 4강에 진출한 것도 그들의 실력을 감안해보려면 최고의 성적이었다. 칠레의 국민들은 혹시나 그들의 팀이 최강 브라질을 꺾으며 결승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지만 가린샤와 바바의 브라질은 칠레보다는 한 수 위였다. 브라질은 가린샤와 바바가 두 골씩 넣는 활약으로 4-2로 승리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결승까지의 행진

조별리그의 존재가 생기면서 조별리그에서 한번 붙었던 팀들끼리 결승 토너먼트에서 재격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는데, 1962년 칠레월드컵에서는 브라질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조별리그에서 한번 붙은 이후 결승 토너먼트를 거쳐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는데, 준준결승전에서 4조의 1위 헝가리와 맞붙게 되었다. 1954년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헝가리는 서독에게 우승을 빼앗긴 이후, 헝가리 혁명을 거치면서 슬럼프를 맞이했지만 극복하고 팀을 새롭게 정비하여 점점 축구 강국으로 서서히 실력을 쌓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가 우세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1-0으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여 서독을 제압하고 올라온 유고슬라비아와 결승 진출을 놓고 6월 13일 경기를 치렀다. 같은 날 브라질과 칠레의 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3-1로 유고슬라비아를 누르고 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멕시코와의 경기를 제외한 4경기에서 한 골만 내준 골키퍼 슈로이프를 포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벽 수비진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공격력을 보완해 주었고, 결승까지 올라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 브라질, 세계 최강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다.

6월 17일, 브라질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결승전에서 먼저 골을 넣은 팀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소스프트가 전반 15분경 선제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갔지만, 2분 뒤 아마릴도가 동점골을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후반전에 들어서 브라질은 점차 경기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지토와 바바가 연속으로 득점에 성공하며 3-1로 승리를 거두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가린샤의 존재였다. 그의 활약은 브라질로 하여금 월드컵 우승을 달성하는 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규정으로는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일이 발생했다.

브라질의 가린샤는 준결승전에서 칠레의 로하와 부딪치며 레드카드를 받았는데, 오늘날의 규정으로는 결승전에는 참가할 수 없었겠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가린샤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결승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브라질의 대회 2연패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7회 대회까지 역대 월드컵에서 제3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빼앗긴 팀이 역전승을 거두며, ‘월드컵 결승전은 역전승으로’라는 새로운 징크스가 축구팬들에게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또한 브라질은 유럽과 남미에서 모두다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월드컵에서 두 번 연속으로 우승한 것은 이탈리아가 먼저 달성했지만, 브라질의 연속 우승이 이탈리아의 연속 우승보다 갚진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탈리아가 우승할 당시에는 불참과 포기가 난무했고, 축구의 규칙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업적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브라질이 월드컵을 두번 연속으로 우승하면서, 세계 축구의 진정한 강자로 등극하였다. '축구를 탄생시킨 것은 영국이지만 그것을 완성시킨 것은 브라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브라질은 이후 오늘날까지 영원한 우승후보 0순위를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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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월드컵 이야기 10] 체코슬로바키아, 준우승에 머물다
[제2회 월드컵] 역전승으로 시작하여 역전패로 마무리한 체코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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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와 축구

체코슬로바키아, 지금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두 나라로 분리되었지만, 제2회 월드컵 당시에는 두 개의 민족, 하나의 국가였다. 14세기에 화려한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던 그들은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300년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10월 28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하나가 되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같은 서슬라브족의 부류에 속해 있었다는 공통분모가 한 몫을 담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축구는 독립 전부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들이 축구를 통해서 민족주의적인 감정과 독립을 위한 꿈을 키운다고 생각해서 이들의 축구 활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01년 체코축구연맹이 창설되었고, 1908년 보헤미아가 FIFA에 가맹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유럽 아마추어 선수권 최강에 올랐고, 당시 세계 최강인 잉글랜드와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독립하자마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축구연맹이 합쳐지고 이탈리아와 벨기에와의 국가대항전에서 승리하고, 1920년 안트워프 올림픽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하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었다(그러나 벨기에와의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주심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경기를 포기하고 철수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1934년 제2회 월드컵,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6강전, 루마니아

제2회 월드컵에 참가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럽 지역 예선에서 같은 서슬라브족의 폴란드를 제압하고 본선 티켓을 확보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16강 상대는 지역예선에서 제1회 대회 4강 진출로 유럽의 자존심을 지켰던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올라온 루마니아였다. 루마니아는 당시 지역적으로는 동유럽에 속하였지만 루마니아인은 라틴계열에 속해있는 민족이었다.

5월 27일에 열린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기에서 먼저 기선을 잡은 팀은 루마니아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전반 37분경 루마니아의 도바이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면서 전반전을 0대 1로 리드 당한 채로 마무리 했다. 그러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16분에 푸치의 동점골과 28분에 네예들리의 역전골에 힘입어 루마니아를 2대 1로 물리치고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8강전,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의 8강 상대는 네덜란드를 3-2로 꺾고 올라온 스위스였다. 5월 31일에 열린 8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16강전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게 선제골을 내주면서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네덜란드 전에서 두골을 넣으며 스위스의 8강 진출에 결정적인 활약을 한 스위스의 키엘홀츠가 전반 18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골문을 열고 선제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곧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스보보다가 24분에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후반전에 들어서 먼저 웃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의 스보트카가 후반 시작 4분만에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스위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 26분경 스위스의 아베글렌 3세가 경기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6강전 결승골의 주인공 네예들리가 후반 38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승리를 결정하는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체코슬로바키아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16강전과 8강전을 모두 선제골을 내주었지만 경기를 뒤집어 역전승을 거두며 경기를 지켜보는 축구팬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4강전, 독일

본선 두 경기를 모두 다 역전승으로 이기고 4강에 진출하며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체코슬로바키아는 4강에서 독일과 맞붙게 되었다. 독일은 16강전에서 벨기에를 5대 2로, 8강전에서 스웨덴을 2대 1로 격파하고 올라온 팀이었다. 이날의 경기는 장신(체코슬로바키아)와 단신(독일)의 경기였다. 이탈리아 관중들은 파시스트당의 주선으로 독일을 응원하였다.

6월 3일에 열린 준결승전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결사 네예들리의 독무대였다. 네예들리는 전반 21분과 후반 15분, 36분에 골을 성공시키며 독일의 노아크가 한골을 만회한 독일을 3대 1로 격파하고 대망의 결승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현재 기록상으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네예들리가 3골을 넣었다는 기록과 두 골을 넣었다는 기록이 공존하고 있다. 후반 36분에 넣은 골이 네예들리의 골이라면 네예들리는 이 대회 기간 동안 총 다섯 골을 넣은 것이고, 만약 다른 선수(크르실)라면 네예들리는 총 네 골을 넣은 것이다.

결승전, 이탈리아

결승전의 상대는 파시즘 군단 이탈리아였다.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결승에 올라온 이탈리아보다는 비교적으로 대진운이 좋았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였지만 실상은 이탈리아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서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6월 10일 대망의 결승전의 주도권은 이탈리아가 잡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이탈리아를 몰아붙였다. 체코의 소보보다와 소보르카 콤비가 전반 20분에 골대를 맞추는 슛을 날리면서 이탈리아 관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전에는 양팀이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후반 26분 체코슬로바키아의 푸치가 선취골을 성공시키며 체코슬로바키아가 1대 0으로 리드하기 시작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서는 추가골을 성공시킬 두 번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골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로서는 다행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우승에 굶주린 이탈리아와 파시즘으로서는 엄청난 굴욕이라는 생각이 그라운드에 팽배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관전하고 있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 선수들은 결코 패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뛰었고 결국 후반 36분, 구아이타의 패스를 받은 오르시가 골문을 향해 회심의 슛을 날렸다. 오르시로서는 정확하게 맞지 않고 빗맞은 것이 행운이었다. 오르시의 발을 떠난 공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골키퍼 플라니카의 손가락을 스치면서 골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헨티나 대표 출신의 두 명(구아이타, 오르시)이 이탈리아를 벼랑 끝에서 건져올린 것이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 돌입하자 경기는 더욱 달아올랐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비진은 몸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 선수들의 체력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연장 5분, 이탈리아의 메아자에게 공이 연결되었다. 당시에 메아자가 부상으로 발을 절고 있었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로서는 메아자를 전담으로 마크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전담할 수비를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메아자는 센터링할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갖게 되었고, 메아자의 발을 떠난 공은 구아이타를 거쳐 스키아비오에게 연결되었다.

스키아비오는 수비 한 명과 골키퍼를 제치고 대회의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골을 작렬시켰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점골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준우승이었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파시스트 독재자의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다 잡은 승리를 놓치게 되었고, 준우승에 머물게 되었다. 대회 초반 역전승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지막 결승전에서 역전패로 마무리함으로써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달콤한 왼발, 네예들리

체코의 네예들리는 총 다섯 골을 넣고 대회득점왕이 되었지만 팀이 준우승에 머무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네예들리가 넣은 골이 다섯 골이 아니라 네 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달콤한 왼발'로 불리는 올드리치 네예들리는 탁월한 감각을 지닌 뛰어난 선수였다. 체코의 공격 루트에서 왼쪽 후방을 맡아 골을 넣는 데 다소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그는 언제나 상대팀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네예들리와 푸치의 조화로 인하여 왼쪽 측면 공격이 상당히 날카로왔다고 한다. 준결승까지 거침없이 골 폭풍을 몰아가던 네예들리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철벽수비에 묶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만약 결승전에서 네예들리가 이탈리아의 수비를 뚫었다면 경기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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