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8] ‘수비 축구’ 이탈리아의 화려한 재기
[1970년 월드컵] 이탈리아 준우승을 차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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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월드컵 이전의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1934년 제2회 월드컵과 1938년 제3회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줄리메컵 영구 소유 후보 0순위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포치오 감독은 1930년대 이탈리아의 전성시대를 주도한 감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의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이라는 정치적인 선전 도구에 불과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월드컵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두 번 우승을 달성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저 그런 성적으로 축구팬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파시즘의 선전도구였다는 인식 또한 점차 잊혀져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벌어진 1950년 제4회 대회와 1954년 제5회 대회에서 잇달아 본선에 올랐지만, 결승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하며 그저 그런 팀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1958년 제6회 월드컵에서는 아예 본선 무대도 밟지 못한 이탈리아로서는 1962년과 1966년에 본선에 진출하면서 다시 한 번 월드컵 정상 도전을 시도했지만 조별리그 탈락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특별히 1966년에는 아시아의 북한에게 패하는 수모까지 당하고 말았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이탈리아 축구는 그야말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나긴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던 이탈리아가 196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어느 정도 행운이 따른 결과였지만 이탈리아 축구가 다시금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6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이탈리아는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빗장수비(카테나치오)를 들고 나와 좀처럼 지지 않는 팀으로 새롭게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발카레리 감독은 “우리는 66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북한의 악몽은 이제 없다”는 선언을 하며 1970년 월드컵 우승 전전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조별리그, 수비는 강하지만 공격에 문제가 생기다

지역예선에서 3승 1무로 동독과 웨일즈를 따돌리며 본선에 진출한 이탈리아는 우루과이, 스웨덴, 이스라엘과 조별리그 2조에 속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는 팀으로는 이스라엘 정도였고, 우루과이와 스웨덴과의 경기는 힘겨운 승부가 예상되었다.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첫 경기(6월 3일, 스웨덴)에서 전반 10분에 도멘기니(Domenghini)가 한 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한 골이 이탈리아가 조별리그 세 경기에서 넣은 유일한 골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두 번째 경기인 우루과이와의 경기(6월 6일)에서 0-0으로 비겼고, 마지막인 이스라엘과의 경기(6월 11일)에서도 0-0으로 비기는 등 빈곤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는 1승 2무로 승점 4점을 기록하며 조 1위를 차지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실망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는 한 골만 넣는 빈곤한 득점력에 비해서 한 골도 빼앗기지 않은 뛰어난 수비 덕분에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할 수 있었다.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우루과이 역시 내용적으로는 두 골을 넣고 한 골을 실점하는 초라한 성적으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다.

이탈리아의 조별리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유럽챔피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탈리아는 유럽챔피언답게 유럽의 스웨덴에게는 이겼지만 남미 대표 우루과이와 아시아 대표 이스라엘과 비기며 자존심을 구겨버렸다. 특별히 4년 전에 아시아의 북한에게 0-1로 충격적으로 패했던 이탈리아가 당연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에게 0-0으로 비긴 것은 결승 토너먼트를 앞둔 이탈리아에게는 상당히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 결승 토너먼트, 공격은 보완되었지만 수비에 문제가 생기다

이탈리아는 준준결승에서 개최국 멕시코와 대결하게 되었다. 멕시코는 개최국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며 조별리그에서 2승 1무(5득점, 무실점)의 성적으로 조 2위를 기록하며 준준결승에 진출한 팀이었다. 특별히 그들은 이전 월드컵에서는 3류 국가에 속해있었지만 고산지대라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6월 14일 벌어진 이탈리아와 멕시코와의 준결승에서 멕시코의 곤잘레스가 전반 13분 경 한 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갔다. 이탈리아는 전반이 끝날때까지 한 골도 넣지 못했지만 멕시코의 수비수 페나가 자살골을 넣어준 덕분에 1-1로 비긴 상황에서 후반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후반전에 들어선 이탈리아는 300분이 넘는 기나긴 무득점 행진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후반 18분 경 이탈리아의 리바가 한 골을 넣으며 2-1로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두 골을 추가로 넣으며 4-1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골결정력의 부족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결승을 향한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1970년 월드컵 4강은 유럽에서 2팀(이탈리아, 서독), 남미에서 2팀(브라질, 우루과이)으로 압축되었다. 모두 다 한번 이상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는 팀이었기에 누가 우승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서독을 제외한 나머지 세 팀은 두 번의 우승 경험이 있기에 3회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준결승은 공교롭게도 유럽은 유럽끼리, 남미는 남미끼리 대결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서독과 6월 11일에 맞붙게 되었다.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유럽의 강호로 부상한 불가리아를 따돌리고 결승 토너먼트에 올라 준준결승에서 디팬딩 챔피언 잉글랜드에게 연장 승부 끝에 3-2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합류한 팀이었다.

이탈리아는 전반 8분 경에 보닌세냐가 한 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갔다. 한골을 먼저 넣은 이탈리아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빗장수비를 단단히 펼치며 승리를 굳히는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기 종료 직전에 서독의 슈넬링거가 기적같이 동점골을 넣으며(90분)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연장전에서 서독의 게르트 뮬러가 역전골을 넣으며(94분) 경기를 1-2로 뒤집었다. 곧이어 이탈리아의 브루니치가 동점골을 넣었고(98분), 리바가 역전골을 넣으며(104분) 경기는 3-2로 이탈리아가 앞서나갔다. 다시 서독의 게르트 뮬러가 동점골을 넣으며(110분) 3-3을 이루었는데, 최종적으로 이탈리아의 리베라가 결승골을 넣으며(111분) 이탈리아가 4-3으로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화려한 명승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교체 선수를 다 써버린 서독의 베켄바우어가 어깨 탈골로 붕대로 팔을 고정시키고 경기에 임할 정도로 경기는 양 팀이 서로 물러서지 않는 한 판이었다. 빗장수비(카테나치오)의 이탈리아와 리베로 시스템의 서독의 대결은 둘 다 수비가 탄탄하기 때문에 많은 골이 터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연장전에서 터진 다섯 골은 그날의 경기가 얼마나 박진감이 넘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화려한 조연,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결승 상대는 최강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설명이 필요없는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수비가 튼튼한 이탈리아와 공격이 강한 브라질의 경기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결승 토너먼트의 두 경기만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는 총 8골을 넣었고, 4골을 실점했다. 그들의 빗장수비에도 허점이 많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브라질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감독은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의 핵심인 리베라를 선발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전반을 1-1로 대등하게 맞서며 쉽게 지지않는 그들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빗장수비도 최강의 공격력을 갖춘 브라질의 공격을 90분 내내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후반에 세 골을 허용하며 1-4로 패하고 말았다.

가장 먼저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브라질에 대해서 이탈리아의 감독은 “지금 이 브라질팀을 이길 팀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며 패배를 인정했다. 월드컵의 승자 브라질은 명실상부 최강의 팀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월드컵 3회 우승의 금자탑, 줄리메컵 영구 소유의 주인공 브라질을 이길 팀은 없었다.

# 수비 축구의 이탈리아의 성공적인 재기

비록 브라질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70년 월드컵은 폐막되었지만, 기나긴 슬럼프를 딛고 재기에 성공한 이탈리아 역시 성공적인 팀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38년 우승 이후 기나긴 슬럼프에 빠졌던 이탈리아가 32년 만에 결승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한 것은 이탈리아로서는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결승 토너먼트에서 그들의 수비가 많이 뚫렸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의 수비는 축구에서 수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월드컵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으로 최강의 팀은 나름대로 최강이 되기 위한 실력과 행운, 그리고 자격을 갖춘 팀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최강의 팀과 대결했던 많은 팀들은 조연에 머물렀지만 나름대로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조연들 중에서 최강 브라질과 정상을 겨루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탈리아의 존재는 ‘강력한 2인자’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축구가 수비축구의 진수라는 사실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비가 ‘카테나치오’라 불리는 빗장수비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성공은 곧 월드컵에서 수비 축구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결과가 되었다. (월드컵 시작 전에 뛰어난 공격력을 가진 팀도 수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결국 낙마한 브라질의 살다냐 감독은 이후 현대 축구의 흐름을 정확하게 간파했지만, ‘한 골을 잃으면 두 골을 넣는’ 브라질에게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의 재기는 현대 축구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 1968년 제3회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유럽축구의 챔피언을 가리는 제3회 대회가 1968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원래 이 대회의 이름은 ‘유럽 네이션스 컵’이었는데, 제3회 대회부터 ‘UEFA 유럽 축구 선수권대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회의 방식 또한 새롭게 바뀌었다. 8개의 조로 나뉘어 각각 두 번씩 겨루어 각 조의 1위 팀이 2차전으로 진행되는 8강전에 진출하였다. 8강에 진출한 팀들이 홈앤드어웨이로 맞붙어 이긴 승자 4팀의 준결승부터는 개최국 이탈리아에서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이 끝나고 10월부터 조별 예선이 치러졌는데, 월드컵을 유럽으로 가져온 이후에 벌어진 대회인 만큼 월드컵 본선에서 맹활약한 팀들과 본선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팀들, 그리고 본선에 참가하지 못한 팀들이 유럽의 최강자를 가리기 위해서 자존심을 걸고 참가한 대회였다.


# 조별 예선 - 8개조


예선 1조에서는 스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아일랜드, 터키가 한조가 되었다. 스페인은 월드컵에서 서독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 3위를 기록하며 결승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 팀이었는데, 3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체코슬로바키아(3승 1무 2패)를 제치고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196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아깝게 포르투갈에게 본선 티켓을 내어주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키와 비기고(0-0) 아일랜드에게 패하는 바람에(1-2) 승점 1점 차이로 2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196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포르투갈에게 아깝게 1위 자리를 내준 이후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보았다.


예선 2조에서는 불가리아, 포르투갈, 노르웨이, 스웨덴이 한조가 되었다. 불가리아는 1966년 월드컵에서 3패로 초라한 성적을 거둔 반면 포르투갈은 승승장구하며 3위까지 올라간 팀이었다.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팀들이었다. 불가리아는 4승 2무를 기록하며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월드컵의 4강 신화를 유럽축구선수권대회로 이어가지 못하고 2승 2무 2패로 2위를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된다.


예선 3조는 소련, 그리스,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속해 있었다. 월드컵 4위의 소련은 5승 1패로 그리스(2승 1무 2패)와 오스트리아(2승 1무 2패)를 일찌감치 따돌리고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예선 4조는 유고슬라비아, 서독, 알바니아가 속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한을 풀고자 하였고, 서독은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한 여세를 몰아가려고 하였다. 이들의 최종 순위는 동네북 신세였던 알바니아가 결정해 주었다. 서독과 알바니아의 마지막 경기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3승 1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서독은 2승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서독이 알바니아를 이길 경우 골득실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서독으로서는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알바니아는 세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12점이나 실점한 팀이었다. 누가 보아도 서독이 이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알바니아가 예상외로 서독과 비기는 바람에 유고슬라비아가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예선 5조에서는 올림픽 챔피언 헝가리가 베네와 파르카스를 앞세워 4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동독, 네덜란드, 덴마크를 따돌리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네덜란드는 2승 1무 3패를 기록하여 동독(3승 1무 2패)에 이어 3위를 차지했지만, 후에 토탈사커를 전 세계에 알리는 영웅 요한 크루이프가 두 골을 넣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예선 6조에서는 월드컵에서 북한에게 일격을 당하며 충격을 입었던 이탈리아가 5승 1무의 성적으로 루마니아(3승 3패), 스위스(2승 1무 3패), 키프로스(1승 5패)를 일찌감치 따돌리며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예선 7조에서는 프랑스가 4승 1무 1패를 기록하여 벨기에(3승 1무 2패), 폴란드(3승 1무 2패), 룩셈부르크(1무 5패)를 따돌리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벨기에로서는 프랑스에게는 1승 1무로 우위를 지켰지만 폴란드에게 2패를 당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예선 8조는 영국에 속한 네 개의 팀이 ‘영국선수권대회’로 겸해서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가 4승 1무 1패를 기록하여 스코틀랜드(3승 2무 1패), 웨일즈(1승 2무 3패), 북아일랜드(1승 1무 4패)를 따돌리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게 1승 1무로 우위를 지켰지만 북아일랜드에게 1-0으로 일격을 당하는 바람에 승점에서 1점 뒤져 2위에 머물렀다.


# 8강 토너먼트


불가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기에서는 양 팀이 1승 1패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골득실에서 앞서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소련 역시 헝가리와 1승 1패를 기록했는데, 골득실에서 우세하여 4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소련은 세 번 연속으로 4강 진출에 성공하며 유럽 축구의 강자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1966년 월드컵 우승국인 잉글랜드는 우승의 주역들이 활약하며 디팬딩 챔피언 스페인을 2승(1-0, 2-1)으로 제압하고 4강에 합류했다.


유고슬라비아는 프랑스와 대결하였는데, 적지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1-1), 홈에서 5-1로 대승을 거두며 4강에 합류했다.


이로써 4강은 동유럽에서 2팀(소련, 유고슬라비아), 서유럽에서 2팀(잉글랜드, 이탈리아)이 진출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봤을 때 동유럽의 축구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서유럽의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 행운의 유럽챔피언 이탈리아


1966년 월드컵에서 아시아의 북한에게 패하고 조별리그 탈락의 쓴잔을 마셨던 이탈리아는 6월 5일, 4강에서 소련을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하였는데, 동전던지기로 승자가 되어 결승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한편 같은 날 벌어진 잉글랜드와 유고슬라비아와의 준결승은 Dragan Džajić이 후반 종료를 얼마남겨놓지 않고 결승골을 뽑아낸 유고슬라비아의 승리로 끝났다.


6월 8일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는 1-1로 비긴 후에 6월 10일에 재경기를 가졌는데, 이탈리아가 2-0으로 승리하고 유럽챔피언에 오르며 월드컵에서의 충격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6월 8일에 거행된 잉글랜드와 소련의 3-4위전은 바비 찰튼과 허스트가 전 후반에 각각 한골을 넣은 잉글랜드가 승리하고 3위를 차지하였다.

[월드컵 이야기 43] 북한, 세계를 놀라게 하다
[제8회 월드컵] 북한, 이탈리아를 꺾고 준준결승에 진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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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변방의 희망, 북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월드컵은 엄밀한 의미에서 월드컵이 아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홀대하면서 월드컵은 유럽과 남미의 독무대가 되어 버렸다. 특별히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팀들은 지역예선을 통과하더라도 유럽의 팀들과 예비고사(플레이오프)를 치르는 과정을 겪으며 단 하나의 팀도 본선을 밟지 못했다.

1966년에도 축구의 후진국을 배제시키려는 FIFA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묶어서 단 한 장의 본선 티켓만을 할당한 것이다. 해당 지역의 국가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지역예선을 거부했고, 아시아에서도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러한 FIFA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참가를 포기하였다.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대표는 호주를 이긴 북한이 차지하게 되었다. 국제무대에서 북한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팀이었다. 2년 전 1964년 동경 올림픽 본선에 이름을 올렸지만 대회 직전에 참가를 포기한 것이 그들의 국제대회 성적표였다.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우승할 확률은 500대 1로 낮게 평가되고 있었는데, 가장 우승할 가능성이 높은 브라질이 2대 1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북한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는 팀’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 조별리그, 돌풍을 일으키다.

북한은 소련, 이탈리아, 그리고 칠레와 함께 조별리그 4조에 속했다.

북한의 월드컵 첫 상대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1956년 올림픽 우승, 1962년 칠레 월드컵 8강, 1960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96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의 성적이 말해주듯 1950년대 이후 유럽에서 정상권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팀이었다. 북한은 1966년 7월 12일 소련과 월드컵 첫 경기를 치렀는데, 소련의 거의 기계와 같은 조직력에 0-3으로 패하고 말았다.

북한의 두 번째 상대는 남미의 칠레였다. 비록 칠레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개최국의 이점을 과도하게 이용했기 때문에 실력보다 높은 성적을 냈다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월드컵 3위라는 성적은 개최국의 이점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성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서는 8강 진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상황은 칠레도 마찬가지였다. 칠레는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에게 0-2로 패하며 1패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7월 15일, 북한과 칠레의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에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0-1로 리드를 당했다. 후반전 종반까지 0-1로 끌려다니던 북한은 종료 직전에 박성진이 동점골을 넣으며(88분) 간신히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1무 1패의 북한이 마지막으로 만난 팀은 월드컵 2회 우승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였다. 1930년대 화려함을 많이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유럽의 강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 조별리그에서 칠레를 2-0으로 이기고, 소련에게 0-1로 아쉽게 패한 이탈리아는 1승 1패로 비기기만 해도 8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7월 19일, 북한과 이탈리아가 격돌했다. 이탈리아는 북한의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스피드, 그리고 짧고 정확한 패스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몸집이 작은 북한 선수들은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쉽게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후반전에도 북한 선수들의 스피드가 줄어들지 않자 후반에 선수 전원이 교체되었는데도 몰라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전반 42분, 박두익의 골이 결승골이 되어 북한은 이탈리아를 1-0으로 이기고 1승 1무 1패를 기록하여 이탈리아를 제치고 조 2위를 차지하며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 하마터면 4강에 진출할 뻔한 준준결승전

북한이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누르고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 것은 세계 축구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북한의 승리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물리친 이래 가장 충격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북한에게 패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분노한 팬들을 피하기 위해서 한밤중에 몰래 귀국하였지만, 분노한 팬들의 썩은 과일, 야채, 달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북한의 준준결승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에는 에우제비오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었는데, 조별리그에서 헝가리, 브라질, 불가리아를 차례로 격파하며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특별히 브라질에게 패배를 안겨주면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안겨준 것은 북한이 이탈리아를 탈락시킨 것과 함께 이 대회 최고의 뉴스가 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북한의 준준결승을 보기 위해서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는데, 대회의 돌풍을 몰고 온 포르투갈과 북한의 인기는 준준결승 4경기 중에서 개최국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하는 경기 다음으로 많은 관중을 불러들인 경기였다.

7월 23일, 포르투갈과 북한이 4강 진출을 놓고 한바탕 격돌하였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박성진이 선취골을 올렸고, 22분에는 이동운이 추가골을 넣으며 2-0으로 리드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We want three!”(세번째 골을 넣어라!)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이어 양성국이 세 번째 골(25분)을 넣자 관중들은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우제비오의 포르투갈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해 유럽최우수 선수인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는 곧바로 한 골을 만회하였고(27분), 전반 종료 직전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3으로 추격하며 전반전을 마무리 하였다.

후반에 들어서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동점골을 성공시킨 후(56분), 3분 뒤에 역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역전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토가 한 골을 추가로 넣으며(80분), 포르투갈이 5-3으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아시아의 호랑이

축구 경기에서 3점을 이기던 북한이 3-5로 역전패한 것은 같은 민족으로서 두고 두고 아쉬운 순간으로 남았다. 포르투갈은 '적이지만 훌륭했다.' 포르투갈이 먼저 3점을 빼앗기고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력상 앞서고 있는 팀에게 너무 빨리 득점에 성공하면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북한은 3점을 너무 빠른 시간(25분)에 넣어버렸다. 포르투갈로서는 따라갈 시간이 충분했다.

그러나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북한은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플레이는 세계를 놀라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FIFA로서는 북한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더 이상 약체라고 해서 본선 출전의 기회를 제한하는 것보다 약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이번 1966년 월드컵처럼 이변과 돌풍으로 월드컵이 더욱 흥미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결국 FIFA는 다음번 월드컵부터 아프리카(1장), 아시아와 오세아니아(1장)에게 본선 진출의 기회를 확대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전히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한 자리도 허락하지 않던 FIFA가 두 자리를 허락했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 출전하여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한 북한의 수훈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를 대표하는 나라가 되어 축구선진국이라고 자부하던 유럽의 이탈리아를 꺾은 것은 축구 변방, 축구 후진국들에게 대리만족인 동시에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축구는 북한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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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U포터뉴스에도 올립니다.

이탈리아, 월드컵 2연패의 금자탑을 이루다
[월드컵 이야기 15] 이탈리아, 운도 많이 따랐던 제3회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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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팬딩 챔피언 이탈리아

제2회 월드컵의 우승자 이탈리아는 1930년대 세계 축구의 정상으로 군림하였다. 1934년 월드컵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누르고 우승한 이탈리아는 2년 뒤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라이벌 오스트리아를 누르고 다시 한번 정상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록으로 살펴보면 이탈리아는 무적의 군단은 아니었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은 개최국이라는 이점을 충분히 살린 결과였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4강에서 노르웨이와 연장 승부를 벌이며 간신히 승리하였고, 결승에서도 오스트리아와 연장 승부 끝에 2-1로 승리하고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축구는 그야말로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처럼 과정보다는 우승이라는 결과를 더욱 선호하고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가 우연하게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토리오 포조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이 뒷받침된 이탈리아는 1938년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여전히 우승후보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었다.

# 이탈리아 이외의 우승을 노리는 국가들

1938년 제3회 월드컵을 맞이하여 이탈리아는 대회 2연패를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이탈리아가 경계해야 할 국가는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브라질 정도였다.

이 중에 오스트리아는 ‘기적의 팀’으로 불리며 대회 직전까지도 강력한 우승후보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지역예선까지 통과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독일에게 합병되어 팀이 해체되고 독일팀에 흡수되는 바람에 참가 자격을 상실해 버렸다.

노르웨이는 1936년에 동메달을 차지하였는데, 동메달 획득의 주역인 Arne Brustad, 그리고 지역예선에서 6골 중 혼자 4골을 넣으며 팀을 본선에 올려놓은 Reidar Kvammen, 그리고 노르웨이 국내에서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인정받고 있는 Knut Brynildsen가 공격라인을 형성하며 다크호스로 지목되고 있었다.

폴란드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빌리모프스키가 없이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4강에 들었는데, 이번 월드컵을 맞이하여 빌리모프스키가 팀에 합류하면서 공격력이 상당히 증가된 팀으로 부활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4년 전에 이탈리아와 정상을 놓고 대결한 적이 있는 팀으로 4년 전보다는 그 비중이 떨어지지만 아직 네예들리가 팀을 이끌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승후보의 대열에 꼽힐 수 있었다.

초창기 축구 역사에 있어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동구권(중유럽)의 축구의 정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헝가리 역시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팀으로 분류되었다.

남미의 유일한 참가국인 브라질은 그 당시에는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보다는 약간 밀리는 실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네오니다스라는 뛰어난 스트라이커를 보유하고 있었고, 다른 남미 국가들이 불참하는 가운데 우승을 장담하며 참가를 강행할 정도로 의지가 있었다.

# 이탈리아, 결승을 향한 행진

이탈리아가 우승을 향한 여정에서 처음으로 만난 상대는 북유럽의 강호 노르웨이였다. 노르웨이와 이탈리아는 2년 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준결승에서 만난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다(노르웨이는 연장에서 이탈리아에게 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으며, 폴란드에게 3-2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차지했다).

1938년 6월 5일, 이탈리아는 노르웨이를 상대로 경기 시작한 지 2분 만에 페라리(Ferraris)가 골을 성공시키며 1-0으로 앞서나갔다. 한 골을 뒤진 노르웨이는 브룬스타드와 브루닐센을 앞세워 줄기차게 이탈리아의 골문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수비와 골키퍼는 많은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후반 종반까지 이탈리아는 1-0으로 앞서며 승리를 눈앞에 두었지만, 노르웨이의 스트라이커 브룬스타드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노르웨이로서는 연장에서 역전을 노렸지만, 노련한 이탈리아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2-1로 무릎을 꿇었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행운도 많이 따랐는데, 노르웨이가 넣은 골 하나가 오프사이드로 판정되어 득점으로 인정되지 못하였다.

노르웨이를 힘겹게 물리치고 8강에 진출한 이탈리아는 6월 12일, 비교적 쉬운 상대인 프랑스와 준결승 진출을 위해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보다는 전력이 약했지만, 개최국이며 첫 번째 라운드에서 벨기에를 3-1로 제압하며 사기가 올라있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선수들이 파시즘의 이탈리아를 꺾어주기를 기대했지만, 객관적인 실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날의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피올라가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며 3-1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의 준결승 상대는 남미의 브라질이었다. 비록 브라질이 당시에 남미의 정상권(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는 조금 못 미치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브라질은 첫 번째 라운드에서 빌리모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를 상대로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6-5로 간신히 이겼다(6월 5일). 다음으로 8강에서 브라질은 또 다른 강팀을 만나게 되는데, 4년전 월드컵 준우승으로 네예들리가 버티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브라질은 체코슬로바키아와 1-1로 비긴 후에(6월 12일), 재경기를 통하여 2-1로 간신히 이기고(6월 14일)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준결승에 올라올 때까지 두 번의 연장전과 한 번의 재경기를 치른 브라질로서는 또 다시 이틀 만에 이탈리아와 준결승을 치르는 힘든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 브라질 감독은 체력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레오니다스를 준결승에 내보내지 않고 이탈리아를 이기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오니다스의 공백과 체력적인 열세에서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체력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는 레오니다스가 빠진 브라질을 상대로 6월 16일에 경기를 가졌는데, 먼저 두 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서나갔다.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두 번째 골인 페널티킥 판정에 불만을 품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브라질은 종료 직전에 한 골을 만회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탈리아는 브라질을 2-1로 이기며 결승에 진출하여 헝가리와 우승을 다투게 되었다.

# 이탈리아, 월드컵 2연패의 금자탑을 이루다

이탈리아의 경쟁상대로 지목된 다른 팀들 중에서 노르웨이를 제외하고는 서로 물로 물리는 접전 가운데 탈락하거나(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체력적인 부담을 안고 이탈리아와 상대하는 바람(브라질)에 이탈리아는 비교적 운 좋게 결승까지 합류하였다.

한편 헝가리는 비교적 쉬운 상대를 만나 결승까지 순탄하게 행진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중유럽의 정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헝가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를 6-0으로, 스위스를 2-0으로, 스웨덴을 5-1로 격파하며 결승에 올랐다. 헝가리의 스트라이커 사로시(Sarosi)는 매 경기 득점을 올리며 팀이 결승에 오르는 데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세 번째 월드컵의 정상을 위한 경기는 1938년 6월 19일에 파리의 콜롬보 스타디움에서 6만 5천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피올라(Piola 16분, 82분)와 콜라우시(Colaussi 6분, 35분)가 각각 2골을 기록하며 틱코스(Titkos, 8분), 사로시(70분)가 한 골씩 만회한 헝가리를 4-2로 누르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탈리아는 1934년 월드컵 정상, 1936년 올림픽 정상에 이어 1938년 월드컵 정상에 오르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월드컵 이야기 9] 아주리 군단, 월드컵을 제패하다
[제2회 월드컵] 집착에서 우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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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목표는 우승"

제2회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이탈리아가 우승할 가능성은 점차 커졌다. 전 대회 챔피언인 우루과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참을 통보해 온 것이다. 제1회 대회에서 유럽의 비협조적 태도에 대한 복수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루과이의 전력이 그다지 독보적이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의 불참은 이탈리아로서는 우승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 것이 사실이다.

다음으로 남미의 강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예 멤버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비록 2진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상당히 위협적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로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상당히 먼 곳에 배치해 놓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국가들 중에서 경계해야 할 팀은 후고 마이슬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였다. 당시 유럽의 축구 판도는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 뭉쳐 있는 잉글랜드는 여전히 월드컵 참가에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로서는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가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였다.

이탈리아의 포치오 감독은 이탈리아가 최강의 군단으로 탄생되려면 대대적인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리그를 대표하는 클럽의 소속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한편, 다른 나라의 선수라 할지라도 이탈리아와 연관이 있다면 이탈리아 대표 선수로 만들어 버렸다. 파시스트의 협조 아래 아르헨티나의 대표였던 오르시와, 몬티, 구와이타가 이탈리아 대표팀에 합류했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이번 대회에서 홈그라운드 이점 이상으로 국민의 기대와 우승에 대한 집념은 오히려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참가국 16개 팀 중에 최고의 공격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대표로 뛰었던 선수들까지도 불러들이면서 선수 구성이 끝난 뒤, 포치오 감독은 전형적인 잉글랜드 축구를 도입하여 힘과 체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아주리 군단'을 창설했다. 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가장 우승권에 가깝게 접근해 있는 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 16강전, 미국

이탈리아가 16강에서 만난 상대는 전 대회 4강 진출의 신화를 일궈낸 미국이었다. 1934년 5월 27일 파시스트의 열렬한 응원 아래 이탈리아는 구와이타, 메아짜, 스키아비오, 페라리, 오르시, 몬티로 이어지는 힘의 포진에서 분출되는 엄청난 파워로 내세울 것은 힘밖에 없었던 미국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지면 탈락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탈리아는 스키아비오(18분), 오르시(20분), 스키아비오(29분)의 연속 골로 전반을 3대 0으로 끝냈다. 후반 들어서 미국의 도넬리가 한 골을 만회했지만(57분), 다시 이탈리아의 페라리(63분), 스키아비노(64분), 오르시(69분)가 연거푸 득점에 성공하면서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었다. 경기 종료 직전에 메아짜(90분)가 골을 성공시키면서 최종 스코어는 7대 1, 이탈리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버렸다.

# 8강전, 스페인

5월 31일, 이탈리아는 남미의 강호 브라질을 3대 1로 꺾고 올라온 스페인과 8강에서 맞붙었다. 스페인이 예상을 뒤엎고 브라질을 격파하고 8강에 진출하는 데는 자모라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이 있었다. 당시 경기에서 브라질의 파상 공격은 자모라 골키퍼의 전설을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탈리아로서는 브라질을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브라질을 격파하고 올라온 스페인이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스페인의 자모라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은 계속되었다. 전반에만 16개의 코너킥을 얻은 이탈리아로서는 철통같은 스페인의 골문을 열지 못하고 오히려 전반 3분을 남겨놓고 역습으로 한골을 잃고 만다. 후반이 시작되고 경기의 집중력이 생기기 전에 이탈리아의 페라리가 동점골을 넣어 경기는 1대 1이 되었다.

1대 1의 스코어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양 팀은 무승부를 기록하고 6월 1일에 재경기를 하게 되었다. 스페인으로서는 이탈리아의 난폭한 플레이 덕분에 자모라 골키퍼가 부상을 당해 재경기에는 뛸 수가 없었다. 결국 승리에만 집착한 이탈리아는 자모라 골키퍼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스페인을 재경기 끝에 1대 0으로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하였다.

# 4강전, 오스트리아

제2회 월드컵의 4강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로 압축되었다. 이탈리아로서는 결승의 문턱에서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1대 5라는 처참한 스코어로 패한 바 있는 오스트리아와의 준결승이 사실상 결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준결승은 밀라노에서 6월 3일에 거행되었는데, 이 날의 경기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수중전으로 전개되었다. 수중전이 전개되자, 힘의 축구를 구사하는 이탈리아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화려한 기술을 구사하는 오스트리아에게는 상당한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오스트리아의 화려한 기술은 빗속에서는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전반 18분 이탈리아의 구와이타가 오스트리아의 골문을 흔들었고, 그것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었다.

이탈리아가 미국과 스페인,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꺾고 결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르헨티나 대표로 뛰었던 몬티, 구와이타, 오르시의 활약이 컸다. 제1회 대회 때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표가 되어 결승에 진출했던 그들이, 제2회 대회에서는 유럽의 이탈리아 대표가 되어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 결승전, 체코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상대해야 할 팀은 루마니아, 스위스, 독일을 차례로 이기고 올라온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대진운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체코 역시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기술에 의존하는 팀이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포치오 감독의 지휘 아래 힘의 축구를 구사하며 우승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온 팀이었다.

숙명의 결승전은 6월 10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양 팀은 최선을 다해서 상대편의 골문을 공략했지만 후반전 20분까지 0대 0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이러한 균형의 상황에서 먼저 한 골을 넣은 것은 체코였다. 체코의 왼쪽 윙 푸치가 선제점을 넣으면서 승리의 여신이 체코를 선택하는 듯싶었다.

이탈리아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동원되어서야 관중들의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중들의 흥분은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이 경기는 난폭한 관중과 독재자 무솔리니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에서 진다면 이후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선수들의 머리에 떠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남은 시간 8분, 아르헨티나 대표였다가 이탈리아 대표가 된 오르시가 필사적인 돌파 끝에 오른발 슈팅을 날렸고 기적 같은 동점골을 성공 시켰다(이 기적의 골을 넣은 오르시는 경기 다음날 똑같은 지점에서 20여차례 슈팅을 날렸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르시의 동점골은 패색이 짙은 이탈리아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선수들을 구한 것이 되었다.

연장전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가 체코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연장 7분에 메에짜가 체코 진영으로 공을 몰고 들어갔고, 포치오 감독의 사인을 받고 구와이타에게 패스를 했다. 체코의 수비수들이 구와이타에게 몰리는 틈에 구와이타의 발을 떠난 공은 체코 문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키아비오에게 정확히 전달되었고, 스키아피오의 슛은 체코의 골문을 뒤흔들면서 이탈리아가 역전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출발하여, 결국 제2회 월드컵의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의 선전장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월드컵은 제1회 대회 때 심판으로 이름을 날렸던 랑제니의 표현에 따르면 실패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조건 이기는 것에만 집착했던 이탈리아가 우승을 하면서 스포츠 정신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2회로 접어들면서 월드컵 축구는 불순한 생각과 과정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스포츠 제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제1회 대회에서는 한 군데에서 모든 경기가 진행되었지만, 벌써 제2회 대회에 접어들면서 한 도시에서 치르기에는 거창한 대회가 되어버렸다.

[월드컵 이야기 8]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다
[제2회 월드컵] 파시스트의 독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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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 월드컵에 관심을 갖다

제2회 월드컵(1934년) 개최를 희망한 나라는 13개국에 달했다. 그 가운데 스웨덴과 이탈리아가 마지막까지 경쟁했는데 이탈리아가 최종적으로 개최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던 세계 대공황은 각국의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하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스트당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으며 적자를 각오하고 대회 개최를 희망한 이탈리아가 최종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독재자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치경쟁에 뛰어들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월드컵 유치가 자국의 파시즘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것이다. FIFA 역시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고민했지만 창설 30주년 대회가 연기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이탈리아의 축구 열기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스포츠의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무솔리니의 심복으로 축구협회 회장에 앉게 된 바카로 장군은 대회의 목적을 “파시스트 스포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대회 포스터는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파시스트식 경례를 디자인했으며, 경기가 치러지는 각 스타디움을 파시스트당 선전 도구로 삼았다. 당시의 경기는 라디오를 통해서 중계되었는데, 이 중계를 통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전 세계에 홍보되기도 했다.

예선 거쳐 16개국 참가

제2회 월드컵에는 FIFA 가맹국 47개국 중 32개국(유럽 21개국, 북남미 8개국, 이집트, 터키, 팔레스티나)이 참가를 신청했다. 당시에 아시아에서 FIFA에 가맹되어 있던 나라로 일본,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샴(현 타이), 필리핀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예선 없이 곧바로 본선을 치른 제1회 대회와는 달리 제2회 대회부터는 예선을 거쳐 본선 진출국을 결정하였다.

오늘날 자동진출권을 가지는 개최국도 당시에는 예선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4-0으로 이기고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각각 페루와 칠레의 기권으로 자동 출전했다.

미국, 쿠바, 멕시코, 아이티가 하나의 출전권을 놓고 벌인 지역예선에서는 미국을 제외한 3개국이 싸워 그 승자가 미국과 대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1차 예선에서 쿠바가 아이티를 2승 1무로 이기고 2차 예선에 올랐지만 멕시코에 3패로 탈락하고 멕시코와 미국의 승자가 본선 진출권을 놓고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미국이 멕시코를 4-2로 이기고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는데 그 경기는 대회 개막 6일 전 로마에서 치러졌다.

아프리카의 이집트는 터키와 팔레스타인과 한 조가 되어 지역예선을 치렀다. 터키가 기권하고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을 7-1, 4-1로 연파하고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남미의 비협조적 태도

제1회 대회가 유럽의 비협조적 태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남미의 국가들은 제2회 월드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2회 월드컵에는 전 대회 챔피언인 우루과이가 불참을 선언했다. 우루과이가 불참하게 된 원인으로는 4년 전 월드컵에서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한 일종의 항의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와, 파시즘에 오염된 대회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대회 직전에 칠레나 브라질에 연패하면서 주력 선수의 노령화로 팀 수준이 저하된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제2회 월드컵은 유일하게 전 대회 챔피언이 참가하지 않은 경기가 되었다.

비록 지역예선은 통과했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정예 선수를 이탈리아로 보내지 않았다. 당시에 우승에 목이 마른 이탈리아는 획기적인 선수 기용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우승을 위해서 타국의 선수들을 이탈리아로 귀화시켜 자국의 대표로 뛰게 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의 올시와 구와이타와 몬티를 그들의 선조가 이탈리아인이었다는 이유로 귀화시켜 자국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당시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에서 남미로 이민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남미의 경제사정 때문에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귀화하는 축구 선수는 그 이후에도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에는 한 번이라도 대표로 국제 경기에 출전하면 그 후로는 국적을 바꾸어 다른 나라의 대표가 될 수 없지만, 당시에는 한 국가의 대표 선수였다가 국적을 바꾸어 다른 나라의 대표가 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토너먼트로 진행된 대회

제2회 월드컵은 제1회 대회와는 달리 8개 도시에서 경기가 열렸다. 또한 본선은 리그전을 벌이지 않고 16개국에 의한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본선에 오른 16개국은 유럽 12개국(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헝가리), 남미 2개국(아르헨티나, 브라질), 북중미 1개국(미국), 아프리카 1개국(이집트)으로 결정되었다.

본선에 오른 16개 팀이 우승하기 치러야 할 경기는 네 번이었고, 이 네 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아야 했다. 4년을 기다렸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한 경기만 치르고 고국으로 돌아갈 팀이 8개 팀이었다. 첫 경기부터 살아남기 위해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야 했고 승리의 여신은 어느 팀을 살릴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아주리 군단, 1936년 올림픽 축구 정상에 오르다
[올림픽 축구 9]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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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32년 LA 올림픽에서는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바로 2년 전에 프로 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인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순수 아마추어만을 고집하는 올림픽에서 축구 종목은 제외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뒤, 아돌프 히틀러가 야심 차게 준비한 1936년 제10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축구는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축구가 가지고 있는 흥행 요소와 함께 그 수입은 올림픽 조직위원회로 하여금 외면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 버렸다.

1928년 우루과이가 올림픽 정상에 등극한 이후, 세계 축구의 흐름은 남미와 유럽이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2년 뒤에 우루과이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유럽의 소극적인 태도로 그 빛이 바랬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에서는 남미의 강국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불참한 가운데 비토리오 포조 감독이 이끄는 이탈리아가 ‘기적의 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총 16개 팀이 참가했다(이탈리아, 스웨덴, 독일,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폴란드, 헝가리, 핀란드,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터키, 중국, 페루, 이집트). 특별히 이번 대회에서는 오랫동안 참가하지 않던 영국(대영제국)이 24년 만에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이 참가했다. 그러나 남미에서는 페루만 참가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참가를 신청한 팀들 중에서 단연 우승 후보로 꼽히는 나라는 비토리오 포조가 이끄는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그 밖에 아주리 군단에게 수중전 패배로 월드컵을 놓친 ‘기적의 팀’ 오스트리아가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개최국 독일, 축구 종주국 영국,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폴란드, 그리고 유일한 남미국가 페루 등이 다크호스로 지목되었다.

이탈리아, 결승을 향한 힘겨운 행진

1934년 제2회 월드컵에서 개최국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며 우승을 이룩한 이탈리아는 첫 번째 상대로 비교적 약체로 지목된 미국을 만났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 경기에서 힘겨운 승부 끝에 1-0으로 간신히 이겼다. 이탈리아의 안경잡이 공격수 프로시(Frossi)의 득점이 결승골이 된 것이다.

이탈리아가 첫 라운드를 힘겹게 통과한 반면, 개최국 독일은 룩셈부르크를 9-0으로 격파하였고, 오스트리아는 이집트를 3-1로 격파했으며, 노르웨이는 터키를 4-0으로, 남미의 페루는 핀란드를 7-3으로 누르고 나란히 8강에 진출하였다.

이탈리아의 8강전 상대는 스웨덴을 3-2로 이기며 돌풍을 일으킨 아시아의 일본이었다. 모두 다 스웨덴의 승리를 예상한 가운데 일본은 전반의 0-2를, 후반에 3-2로 역전하며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이탈리아를 맞이하여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승리를 기대했지만 기적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8월 7일에 열린 이탈리아와 일본의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전반에 두 골, 후반에 여섯 골을 기록하며 8-0으로 승리를 거둬 첫 경기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버리며 준결승에 진출에 성공했다.

8월 10일, 이탈리아의 결승을 향한 마지막 관문은 북유럽의 노르웨이였다. 노르웨이는 비록 1924년과 1928년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영국을 침몰시킨 전적을 가지고 있는 저력의 팀이었다. 특히 노르웨이는 16강에서 터키(4-0), 8강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2-0으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해 있었다.

비토리오 포조 감독이 이끄는 아주리 군단은 노르웨이를 맞이하여 전반에 먼저 한 골을 성공시키며 1-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노르웨이가 한 골을 성공시키며 동점을 이루었다. 결국 양 팀은 전 후반 1-1의 무승부를 기록하고 연장전 승부에 돌입하였다. 연장전에서 이탈리아의 한 골이 추가되었고, 이탈리아는 2-1로 승리하고 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아주리 군단, 올림픽 재패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금메달을 놓고 8월 15일, 행운의 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자웅을 가리게 되었다. ‘기적의 팀’ 오스트리아는 이번 대회에는 ‘행운의 팀’으로 결승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의 행운은 곧 남미의 불행이었다.

이집트를 3-1로 격파하고 8강에 오른 오스트리아는 유일한 남미 국가 페루와 대결하였다. 전후반을 2-2로 마무리한 양 팀이 연장전에 돌입하였고, 연장에서 페루가 두 골을 넣으며 4-2의 스코어를 기록하였으나, 판정 시비로 인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FIFA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양 팀에게 관중 없이 재경기를 치를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FIFA의 결정에 불복하며 페루가 재경기에 불참하였다. 페루의 실격이 확정되고 오스트리아에 4강 진출 자격이 주어졌다. 오스트리아는 4강에 진출하여 준결승에서 폴란드를 3-1로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8월 15일,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와 ‘기적의 팀’ 오스트리아가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서로 격돌했다. 전반전은 양 팀이 서로 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0-0으로 끝났다. 후반전에서 먼저 골을 넣은 팀은 아주리 군단이었다. 이탈리아는 프로시가 70분경 한 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갔는데, 오스트리아의 K. 카인베르거(Kainberger)가 80분경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양 팀이 1-1로 비긴 가운데 연장전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연장전 시작되자마자 첫 골의 주인공 프로시가 2-1을 만드는 골을 성공시켰고, 이 골을 끝까지 지켜 이탈리아가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에서 벨기에로, 벨기에에서 우루과이로 넘어갔던 올림픽 금메달은 이탈리아가 차지했다. 이탈리아는 1934년 월드컵 우승과 함께 1936년 올림픽까지 우승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전성기의 배경에는 뛰어난 지도자 비토리오 포조 감독이 있다.

대회 이모저모

오랜만에 참가한 영국은 첫 라운드에서 아시아의 중국을 상대로 전반전을 0-0으로 득점 없이 비겼으며, 후반전에 간신히 한 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를 챙겼지만 상대가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골밖에 못 넣었다는 사실은 영국으로서는 부끄러운 결과였다. 영국으로서는 두 번째 라운드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으나 오히려 폴란드에 4-5로 패하고 탈락하고 만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영국을 처음으로 격침시킨 노르웨이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영국을 두 번째로 침몰시킨 폴란드가 8월 13일, 3-4위전에서 동메달을 놓고 한 판을 벌였는데, 노르웨이가 3-2로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이탈리아의 프로시(7골)며, 그 뒤로 노르웨이의 아르네 부루스타드(Arne Brustad), 페루의 T. 페르난데스(Fernandez), 폴란드의 게라르드 보다르스(Gerard Wodarz)가 각각 5골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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